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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쭌 Jul 02. 2023

조증의 발현

치명적인 감미로움

어두워질 무렵 길을 나선다. 마음이 비교적 가볍게 뜬 상태는 너무나 즐겁다. 그런 무한한 감미로움이 다가오는 순간들은 생의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가장 행복한 때는 경조증의 상태이며 인간이 어떻게 하면 이런 상태에 오래 머물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연구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내용을 정신과 의사에게서 들은 바 있다. 


 하지만 언제나 가벼운 즐거움의 상태일 수는  없으며 경조증에서 조증으로 변하면서 마음이 더 뜨기 시작한다. 그럴 때는 어디를 걷는지 심지어 여기가 어느 동네인지 가까운 전철역은 어디에 있고 버스 정류장은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런 위험한 상태가 되어 불안과 위험을 느끼면서도 계속 나아가게 되는데  조증 상태의 기분이란 너무 근사해서 중단하기 어렵다.


  수많은 길을 걸어온 후 운이 좋으면 상황을 지각하여 결국에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 경우도 있고 그것조차 여의치 않으면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나 좀 데려와 줘"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내가 의지하는 한 친구는 " 거기 그냥 꼼짝하지 말고 주변의 큰 건물 일층에서 나오지 말고 그냥 고개 숙이고 앉아 있어요 내가 갈 테니까. " 하고 말하면서 결국 나를 데리러 온 적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주인을 잃어버리고 여러 인간에 쫓겨 다니는 개가 다시 주인을 만난 것처럼 안도감과 위로를 얻는다.


  조증이 급작스럽게 발현이 될 때는 남들이 나의 눈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시선을 짓는 적도 많다. 어떤 경우에는 대놓고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증이 조금씩 나의 영혼을 갉아먹을 때면 할 수 있는 최선이란 남들의 시선을 피해서 이상하게 여겨짐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일하다가 말고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뜨게 되면 몰래 정문을 빠져나가 관사에서 머무는 경우도 있고  잠을 자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정신과 약을 챙겨 먹거나 즉시 병원을 방문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뭔가 중요한 만남을 갈 때는 가급적 택시를 탄다. 익숙한 길이라 해도 생각에 몰두하다 보면 내릴 역을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은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조증의 상태는 더 심각하다. 버스를 타는 것이 힘들다 그나마 내릴 곳이 확실해서 내가 가늠할 수 있는 전철이 버스보다 그나마 나은 편이다. 하지만 전철 역시 어디서 환승해야 할지 잊는 경우가 많다.


  "너는 늘 뭔가를 생각하고 있어"라고 이십 대에 한 친구는 그렇게 말한 적도 있다. 이는 어떤 행위나 동작이 나도 잘 모르는 생각 속에 잠겨 있을 때 문제로 발생한다 무엇인가 생각에 집착하면( 그렇다고 해서 그 생각이 특히 고상하고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 지나면 그 생각자체도 잊어버려 무슨 생각을 했는 지도 모르게 된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게 되는 경우도 있고,  원하지 않게도 성적인 가해자로 오인되어 죽도록 맞을 뻔한 일도 당했다


  어차피 조증의 위력에 압도당할 때면 주변의 아는 사람과 아는 환경을 피해 그럴 때는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걸어가는 것을 시도한다. 내가 마음이 떠 있는 눈빛이 들켜도 어쩌다가 허공에 대고 말을 하더라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익명의 섬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그나마 낫다.


  아무에게나 이런 질병을 말하면 당연히 안 되겠지만 나를 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친구에게는 오픈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어차피 이병이 치유받기 위해서는 공동체적인 호의가 필요하며 결국에는 따뜻한 보호와 관심으로 이루어진 사람들과의 네트워크에 겹겹이 나를 둘러싸게 해야 한다. 상담사들과 지역사회의 사회복지사 그리고 친구들 등 언제든지 내가 이상이 생겨 문제;가 발생할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아무 때나 언제든지 위험신호를 보내면 집 안까지 들어와 주겠다고 한 상담사가 있어서 너무나 고맙고 든든했다.




조울증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고 약의 통제를 받으면 정상의 상태인 것처럼 감쪽같이 타인을 속일 수 있으면서도 불안정한 상태가 되면 이래저래 자신과 타인을 괴롭힌다는 측면에서 매우 사치스러우면서도 위험한  질병이기도 하다. 질병과 공존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적인 실존인데 어쩔 것인가. 이 병에 대해 최대한 많이 알고 버티면서 살아가야 하는 엄숙한 숙제를 안고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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