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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쭌 Aug 24. 2023

잊을 수 없는 만남

 글을 쓰게 된 이유

  어떤 만남은 쉽게 잊히지만 살아가는 동안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잊을 수 없는 만남도 존재한다.


  입시스트레스와 시한부종말론에 대한 충격으로  조증삽화를 겪은 첫 번째 입원과,  재수에 대한 실패의식과 세상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으로 다시 입원한 두 번째의 경우를 겪고 난 이후에는,  다시는 병원의 신세를 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그 후 이십여 년 동안  그럭저럭 살아나갈 수 있었고, 처방약 리튬 (Li)이 가끔은 조울증 환자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몸에 잘 맞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직장의 업무를 감당하기 못하면서 생겨난 스트레스에 따른 극단적인 선택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선택한 세 번째 입원은, 그러한 자신감이 바닥나고 이제는 근근이 버텨온 직장생활도 더 이상 못할 것 같다는 공포감과 절망감을 가지게 하였다.  의사의 소개로 입원한 모 병원에서, 잊지 못할,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만남을 경험하게 되었다.


  룸메이트는 할아버지였는데 알고 보니 스무 살 때 발병하여 대략 사십 년간을 여기서 지냈다고 한다. 자리 위 항상 커다란 성경책찬송가집이 있었는데 아마도 신앙에 의지하여 그 많은 세월을 넘어오신 것처럼 여겨졌다.


  다들 병원에서 아침에 일찍 식사를 하고 나면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병원의 긴 복도의 한쪽 끝에서 한쪽 끝까지 좀비의 행렬처럼 걷기를 한다. 티브이를 시청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드라마 추노가 큰 인기를 얻던 무렵이었다. 동전커피를 가볍게 마시고 운동장으로 야구공이나 축구공 농구공들을 가져가서 잠시 운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같이 공차기에서 알게 된 사람은 40대 초반으로 나보다 두 살 어렸는데 대화를 해보니 그는 20대에 발병하여 입원해서 거의 이십 년을 입원했다고 한다.


   병원 복도에 배치된 탁구대에서 탁구를 치면서 알게 된 여자분은 오십 대였다. 보통 수요일마다 사회복지사가 와서 진행하는 심리치료 시간이 있었다.  다 같이 그림을 그리고 설명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는 병실에  어떤 사람이 줄에 매달려 있는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설명하기를 그림 속의 사람은 자신의 오빠이고 같은 병원 내의 다른 병실에서 입원해 있다는 것이다.


   남매 둘이 정신질환에 걸려서 30년간을 같이 입원해 있다니. 이것은 나에게 큰 충격과 공포심을 느끼게 했다. 길어야 두세 달 정도의  입원경력이 있는 나로서는 이들을 만나기까지, 수십 년을 아니 아마도 평생을 병원에서 살아야 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었다. 까닭 모를 슬픔과 분노 같은 것이 밀려왔다. 연민과 두려움이 깊이 마음을 지배했다. 대화를 해보면 대부분 공통되는 말을 하는데,  자살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다는 것과 부모님이 집 한 채는 팔았다는 말과 자신은 쓰레기라는 말등이었다. 사실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쓸모없는 인생이라....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할 것이다. 인생을 세상에서의 쓸모라는 척도에서 본다면 기능적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면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하기 때문에.  하지만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지 않은가. 소위 미쳤다는 말은 무엇일까. 우리들의 미침은 두뇌의 사고이지만,  세상의 거대악을 만들거나 이에 일조하는 사람들이 진짜 미친 인간이 아닌가


  정신질환에 걸리는 사람들은 성격이 맑고 곧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일반인들에 비교하여 범죄를 발생할 가능성이 더 낫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집단으로 오인받기도 한다. 퇴원하고  일상으로 복귀하고 나서도 오랫동안, 다시 직장생활에 전전긍긍하게 되는 때면 세상과 싸울 필요가 없는 그들의 인생이 부럽기도 했고 나도 그들처럼 평생을 병원에서 사는 것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존재 그대로보다 폄하되고 있는 이들의 삶을 나의 삶을 언젠가 글로 써보고자 했다. 이러한 병에 걸려 사는 것이, 혼자만 아는 지옥을 기지고 타인에게 이해되기 어려운 연약함과 비참한 삶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나와 그들, 우리 모두의  잘못이 아님을, 우리의 무고와 결백을 증언하고 스스로를 응원하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모든 시도가 실패로 무위로 끝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최소한 나를 구원하는 행위가 되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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