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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Jan 03. 2023

하얀 거짓말 Vs. 검은 진실

오늘은 내 일생일대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


가슴이 콩닥거린다는 말보다 쿵쾅거린다는 표현이 훨씬 더 어울린다. 몇 시간 후 그녀와 단둘이 마주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하게 흘러나온다.      


일 년이 넘게 짝사랑하던 그녀와의 첫 데이트다. 


꿈에서 조차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단 한순간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동안 나는 오직 오늘을 위해서 ‘모태솔로’라는 치욕적인 놀림을 참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이제부터 제대로 보상받을 것이다. 높은 금리의 이자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머리카락을 두 번이나 빡빡 감았다. 

그래도 영 찝찝하고 불안하다. 뻔히 알고 있는 결과이기에 그저 심리적인 위안을 삼기 위함이었지만 별 효과가 없다. 모자를 써볼까 했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다. 그래도 평소 내 스타일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평가받던 하나를 골라 놨다. 여차하면 쓰고 나가는 편이 어쩌면 여러모로 편안하리라. 오늘이 잘 끝나야 내일도 있는 법이다. 사소한, 아니 사소했으면 하는 일이 지독한 악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사전에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두 번을 기대할 수 없다. 오직 단 한 번의 기회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나에게는 심각한 질환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결벽증. 

나 스스로는 남들보다 조금 더 민감한 편이라고 주장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매번 내 행동을 볼 때마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면서 당장 고쳐야 할 병이라고 했다. 그저 깔끔하고 정리된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가졌을 뿐인데, 더군다나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음에도 왜 나를 기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그들을 피하는 것이 보다 정상적이고 논리적인 반응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내가 다년간에 걸친 심신 수련을 통해서 그들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요 근래 들어서는 어지간히 더럽지 않으면 못 본 척 지나칠 수 있는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드러나지 않게 꾹 참으면서 말이다.     


나머지 하나는 머리카락을 감고 두 시간 정도만 지나면 어깨에 떨어지기 시작하는 ‘악성 비듬’이다.

이것은 나에게 재앙과도 같다. 결벽증은 그나마 ‘어느 정도’ 해결(물론 내 기준에서)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지랄 맞은 비듬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도대체 좋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삭발도 해보고, 머리에 온갖 약품들을 들이부어도 보고, 심지어 불로 그을려 보기까지 했지만 초겨울 들판에 서리가 내리듯 얼마 지나지 않아 비듬이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결벽증과 비듬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저주로 인해서 나는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오고 있다. 그녀는 과연 이런 나를 이해해 줄까? 처음 사랑을 느낀 사람이기에 생소한 두려움이 나를 압도하고 짓누르는 중이다. 처참하게 차일 것 같아서 그냥 포기할까 하는 마음이 요동쳤지만, 비겁한 후회보다 고통스러운 도전을 선택하기로 했다. 혹시 내가 동화 속 주인공이라면 개구리왕자였으면 좋겠다. 아니다. 왕자개구리인가?     


시간이 다가올수록 저항할 수 없는 긴장감 때문에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나가기 직전에 다시 한번 머리를 감고 깨끗하게 말린다. 원망스럽다. 하지만 이 또한 극복해야 할 역경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별일 아니라면서 해맑게 웃어줬던 꿈과, 정색을 하면서 뒷걸음치던 꿈이 동시에 떠올랐다.     


이제 옷만 입고 나가면 된다.     


옷장을 열자 수두룩 빽빽한 ‘흰옷’들이 언제나처럼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지난 주말에 새로 구입한 ‘검은색 옷’ 한 벌이 마치 하얀 눈밭에 홀로 우뚝 서서 나를 노려보는 '시커먼 저승사자'처럼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얼마 만에 구입한 검은색 옷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그리고 얼마나 정성 들여 힘들게 고른 명품인지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다. 지금 옷을 입지 않으면 약속 시간에 늦는다.      


어느 쪽으로도 손이 가질 않는다. 



                  

후회는 없다.

어쩌면 천만다행일지도 모른다. 


고맙게도 그녀는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었다. 그리고 수줍게 그녀의 '검은 진실'을 숨김없이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첫사랑이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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