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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Jan 27. 2023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

     

어릴 적, 저희 집은 가부장적이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경상도 남자의 특징을 대부분 가진 아버지와 또 흔히 말하는 경상도 여자의 특징을 대부분 가진 어머니.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지만요.^^)     

집안 대소사는 모두 아버지의 허락을 거쳐야 했으며, 반기를 들 엄두조차 하지 못하는 분위기였기에 저도 자연스럽게 적응, 아니 세뇌에 가깝다고 봐야 할 정도로 아들(장남)의 역할을 해 나갔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로 기억합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는데, 귀신에 씌었었는지 마치 홀린 듯 전자오락실로 발걸음을 향하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빼앗는 불량배들도 많았고,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험악하고 음침한 놀이터(?)였기에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보시기에는 초등학생이 입장하면 안 되는 곳이었죠. 학교나 집에서 모범생이라는 칭호(^^)를 받던 저였던 지라, 오락실에 가면 큰일이 난다고 여기며 평소엔 눈길도 주지 않았는데, 진짜 왜 그렇게 대담하게 그곳에 발을 들였는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짜릿한 신세계를 경험하고, 가라앉지 않은 흥분을 억누르며 느지막이 집에 들어갔더니 어쩐지 공기가 싸늘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치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바라보며 물어보시더군요.     


“어디 갔다 왔니?”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으려고 했으니 더 당황한 것처럼 보였겠죠. 애써 태연한 척 말했습니다.     

“친구랑 놀이터.”     


“비 오는데?”     

“응? 응. 우산 쓰고 이야기하면서 놀았어.”     


“마지막으로 묻는다. 어디서 뭐 하고 왔어?”     

아버지의 최후통첩이 떨어졌지만, 저도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놀이터에 친구랑 있었다니까. 왜 안 믿어요?”     


그리고 그날, 저는 제 짧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아버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았거든요.

말 그대로 비 오는 날 먼지가 풀풀 나게.     



저는 거짓말을 싫어합니다. 

다들 싫어하시겠지만 유난히 더 싫어합니다. 거짓말에 대한 정의와 인식을 떠나서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충격이 혼합되어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아 버렸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좋은 결과로 이어졌으니 다행이라고 여기기도 하지만 그 경험 이후로 저는 아버지를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어머니하고만 이야기를 하거나,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그 두 분이 없을 때는 혼자 끙끙 앓아야 했고요. 하지만 아버지를 찾는 경우는 결코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30대에 접어들었을 때, 가족 모임에서 갑자기 팔씨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동네에서 장사(壯士)로 소문이 자자했었기에, 저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상대가 되지 않았죠. 그런데 점심 식사 후 식탁에서 가족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아버지의 손등을 처음으로 바닥에 닿게 했습니다.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더 이상 가부장적이지도 않고 기력이 약해지신 아버지, 그리고 처음 매를 들었던 그 무서운 얼굴이 겹쳐지며 가슴이 싸하게 내려앉았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깡패도 무섭지 않다. 귀신도 그저 그렇다. 내가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사람은 오직 내 아버지 밖에 없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며 지냈었습니다. 그런데 많이 것이 순식간에 달라졌습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사실 어제 일 때문입니다.          


아이는 드림 렌즈라는 시력 교정용 렌즈를 사용합니다. 상당히 부담되는 금액이지만, 학교생활이나  일상생활을 편하게 하라고 큰맘 먹고 사준 것이죠. 잘 때 눈에 넣었다가 아침에 빼면, 하루 종일 좋은 시력을 유지하게 해 주는 신기한 물건입니다. 안경보다 불편한 점이 한 가지 있다면, 매일 렌즈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죠.     


어제도 아이는 자기 전에 닦아둔 렌즈를 끼려고 욕실에 들어갔습니다. 아내는 한 달에 한 번 동료들과 하는 식사자리 때문에 외부에 있었고요.      


아이가 자기 전에 와서 인사를 합니다.      

“아빠. 사랑해. 알라뷰. 축복해. 좋은 꿈 꿔.”

(진짜 매일 아이는 저에게 잘 때마다 이렇게 인사합니다.)     


그런데 방에 들어간 아이가 한참 동안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요.     


그리고 오늘 아침.

아내가 그러더군요.

아이가 렌즈를 끼다가 떨어뜨렸는데 그게 세면대 속으로 빠졌답니다. 혼자 힘으로 아무리 해보려 해도 안 되니까 일단 자려고 방으로 들어가서 아내에게 전화를 했답니다. 동료들과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느라 받지 못했던 부재중 전화가 무려 12통. 결국 통화가 되었고 아내는 아이에게 아빠한테 빨리 가서 말하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아이의 대답이.     


“안 돼, 아빠한테 혼날 까봐 무서워.”     


충격적이었습니다. 나름 아이와 가깝게 지내는 편이고, 항상 애지중지하는 외동딸이 그렇게 말을 했다 하니 믿을 수가 없었죠.     


그런데 불현듯 두 달 전쯤 있었던 일이 떠오르더군요. 본인이 큰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오히려 아내와 저에게 너무 과하게 대든다는 생각에 아이에게 처음으로 매를 들었습니다. 격분한 상태라 큰 소리를 지르면서요.     


다시 저의 어린 시절, 아버지, 오락실, 매, 거짓말, 트라우마, 팔씨름 등등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갑니다.     

조금 전에 아이는 아내와 안과에 간다며 나갔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그동안 모아 둔 돈으로 렌즈 값을 치르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제가 아버지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과 함께 과연 아이와의 관계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합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해야 할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아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걱정을 잠재울 방법을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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