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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Jul 14. 2024

투명한 인간

 정말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학교나 군대에서 겪었던 기억이 스멀스멀 다시 머릿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뿌리가 깊어 아무리 줄기를 잘라내도 환경만 적절하게 받쳐주면 하루가 다르게 내 삶을 지배한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처음에는 나의 존재를 일부러 모른 척한다고 여겼지만, 알고 보니 그들에게 나는 경계가 모호하고 실체가 또렷하지 않은 물비늘 같은 캐릭터였을 뿐이었다.


 영웅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멸시했다. 현실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들에게 열광한다니 차라리 어린이들이 보는 동화가 나에겐 더 와닿았다. 하늘을 날고,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고, 칼에 찔려도 죽지 않고, 미래를 볼 수 있고, 사람의 생각을 조종하는 능력이 있는데 왜 영웅의 길을 택하는 것일까?


 나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그녀 덕분이었다. 내 유일한 취미는 짝사랑하는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는데 하루는 우연히 옥상에 올라온 커플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나는 손에 쌍안경을 든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내가 없다는 듯이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더니 가지고 올라온 맥주까지 마시고 사라졌다. 침 넘어가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나는 그들의 행동을 바로 앞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투명인간. 이런 단어를 누가 왜 만들었지 모르겠지만 막상 내가 이렇게 되고 나니 정말 고마웠다. 달리 내 능력을 표현하기 위해 조목조목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평소에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더니 결국 투명하게 바뀌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능력이 발현되는 조건이 특이하다는 점이다. 빌런일 때만, 그러니까 나쁜 짓을 저지르려고 마음을 먹어야 투명해질 수 있다. 운명인 것인가? 영웅이 아니라 악당이 되라는 신의 뜻인가 보다.


 나를 괴롭혔던 자들 중 하나를 골랐다. 솔직히 말하면 나를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기게끔 만든 장본인이었다. 여러 후보 중에 녀석을 타깃으로 삼은 이유는 일단 지금까지도 평판이 좋지 않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투명인간이 된다지만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아서 불을 이용하기로 했다.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투명한 몸 밖으로 빠져나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용기를 내서 실행에 옮기고 말았다. 비록 큰 화재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녀석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마침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당이 된 것이다.


 소심하고 겁 많던 성격에 어느새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 진짜 나의 내면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으로 보아 대충 짐작은 간다. 나쁜 의도가 발현시키는 초능력이라니.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온몸에 활기가 돈다. 가능성이 보인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그들 중 일부가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함께.


 돈과 귀중품을 훔치고, 미운 사람들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남의 비밀을 엿듣고, 회사의 정보를 몰래 빼내서 팔면서 나는 희열을 느꼈고 삶의 본질이란 바로 이런 것에 있다고 느꼈다. 신이 내린 재능을 굳이 묻어둘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십분 활용하는 편이 그 가치를 제대로 드러내는 일이라 믿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더 큰 악당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의 변화와는 다르게 여전히 사람들은 나를 보려 하지 않는다. 대신 세간에 떠들썩한 투명인간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커져가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섞여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투명인간이라는 악당이 되는 순간에는 그들과 함께 한다. 그들 사이에서 그들의 물건과 생각과 이야기를 공유한다.


 한 번은 내 정체를 밝히면 어떨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사라지지 않아도 내가 나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과연 '인정'이라는 것이 나에게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확실하지 않았기에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되돌리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리까 두렵기도 했고, 괴물이 되기보다는 하찮아서 무시당하는 편이 행복할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오늘도 나는 인파 속을 걷고 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기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늘도 나는 사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아무도 보지 못하기에 투명한 악당이나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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