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관심 있어하는 주제, 글로 쓰고자 하는 생각, 그리고 결국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떠올리다 보면 문득 다음과 같은 한마디가 생각난다.
“내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멎는 곳에서 죽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그게 꿈이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 김희성의 대사
이 대사를 떠올리면, 문득 나의 글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분명 의미 있고, 오래 품어온 생각들이지만 어쩌면 독자에게는 ‘무용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은 사실 아주 단순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글을 쓰면 잘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은 이해 여부와 상관없이 그저 내가 전달하고 싶은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이 글이라도 읽혀 나의 생각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감정이나 일상의 느낌을 글로 표현하는 일도 분명 의미 있는 주제이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조금 다른 방향에 있다. 예를 들어, 나는 그런 감정을 가능하게 만든 근본적인 이유, 즉 인간의 본성이나 그 바닥에 놓인 사유 구조를 들여다보는 데 더 끌린다. 그래서 나는 감정이나 순간적인 느낌보다도 그 감정이 생겨난 배경과 논리, 즉 생각을 형성한 구조 자체를 이야기하고 싶다.
예전의 나는 글을 쓸 때 전체의 99%를 내가 주장하는 생각을 증명하는 데 사용하곤 했다.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내 의견은 고작 1%였지만, 그 한 줄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수백 줄의 설명과 근거를 덧붙여야 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시선과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장면을 보고도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글 안에 수많은 전제와 설명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증명’의 무게가 너무 크고 벅차게 느껴질 때가 많아졌다. 때로는 글을 쓰기도 전에 지치기도 하고, 증명하려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써보려 한다. 내 생각을 간결하게 말하고, 그 생각을 떠올리게 된 간단한 예를 덧붙이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이제 독자의 몫으로 남기기로 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써왔거나, 앞으로 써 나가게 될 글의 주제나 방향을 몇 가지로 나누어 정리해 보았다. 그 모든 시작점과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과 그들이 살아가는 ‘삶’이라는 단어가 자리하고 있다.
인간은 슬픈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종종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삶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바라보려고 한다. 그럴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인간은 어쩐지 슬픈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어떤 장소에 여행을 가더라도 그곳의 낯선 풍경이나 일시적인 즐거움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들이 마주한 문제들, 반복되는 하루,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상상해 보면 즐거움보다는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많다.
과연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느낀다. 인간은 늘 선택의 기로에 서 있고, 어떤 길을 택하든 후회나 불안을 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가끔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정말 축복이었는지, 혹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슬픔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언젠가는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조금 더 깊이 써보고 싶다. 그 질문은 아직도 내 안에 오래 남아 있다.
내가 써온 기록들
《힘겨운 하루를 끝낸 당신에게》, 뷰크크
과학은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이다.
나는 과학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과학은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학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 시작점에는 인간이 신의 권위로부터 벗어나 자연을 자기 자신의 눈으로 보기 시작한 변화가 있었다. 중세까지는 자연 현상조차 신의 섭리로 해석되었지만, 과학은 그 세계를 의심하고, 관찰하고, 설명하려는 인간의 시도에서 출발했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수많은 오류와 저항, 그리고 시행착오를 거쳤다. 하지만 그 결과 우리는 지금 휴대폰, 자동차, 비행기 등 수많은 물질적 삶의 도구들을 누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과학과 기술의 축적된 성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같은 흐름 속에서 신의 섭리로 여겨지던 세계 질서가 점차 인간의 이성과 합리로 옮겨갔다. 그때부터 비로소 자유, 평등, 민주주의 같은 정신적 가치들도 사회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이 정신들은 과학 기술이 직접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 신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시작했기에 그런 가치들이 가능해졌다고 나는 믿는다.
과학은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자주 틀린다. 하지만 나는 그 틀림을 인식하고 수정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지극히 인간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호기심이고, 끊임없는 노력이며,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그 너머를 향해 나아가려는 인간의 자세다.
나는 이 과학의 시선이 세상을 다시 보게 해 준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생각을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어떤 이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과학이 인간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이 이야기를 조용히, 그러나 반복해서 꺼내게 된다. 그만큼 이 생각은 내게 중요하다.
지금의 연재나 글들은 이 주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조만간 다른 주제들도 써 보려 한다.
내가 써온 기록들
《인간 없는 산업혁명》, 브런치 연재
《신의 목소리에서 알고리즘까지》, 브런치 연재
《확률적 진실 : 우리는 얼마나 맞는 말 속에 사는가》, 뷰크크
《미래를 예측하다 : 불확실성의 길목에서》, 뷰크크
《두 개의 선 : 환원론과 전체론의 통합으로 가는 길》, 뷰크크
《코드 기반 개발과 비주얼 기반 개발 : 조화의 개발 패러다임》, 뷰크크
통일은 반드시 일어날 일이다
나는 남북통일이 반드시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점이 내일이 될 수도 있고, 몇 년 후가 될 수도 있다. 정확한 시기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그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통일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문제를 쉽게 넘길 수 없다. 통일은 단지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이며, 그 영향은 지금 세대에 그치지 않고 다음 세대, 그리고 그 이후 세대에도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통일은 단순히 남과 북만의 문제가 아니다.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 문서를 보면, 전쟁을 멈추며 서명한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통해 이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 국제적 구조 속에 놓여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 정전협정에는 유엔군을 대표한 미국, 북한, 그리고 중국이 서명했다. 그리고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 당시 북한과 중국의 뒤에는 소련이 있었다.
이 구조는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이들 국가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전략적 판단 없이는 한반도의 통일이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써온 기록들
《어느 날 통일이 되었다》, 뷰크크
나는 과거 인간의 삶을 상상한다
나는 역사를 좋아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역사 속에서 살아갔던 '인간' 자체에 관심이 많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무엇을 두려워했고, 어떤 것을 소망했을까? 정치나 전쟁, 유물이나 기록들을 통해 나는 그 시대를 살아간 한 사람의 눈으로 그 당시의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진다.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감정을 가진 한 인간이 전혀 다른 시대, 다른 환경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방식으로 삶을 이어갔는지를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
역사란 단지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했던 수많은 개인의 삶이 담긴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한민국, 한민족으로 산다는 것
나는 대한민국에서 한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종종 감사함을 느낀다. 외신을 보면 인종차별과 관련된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문제는 앞으로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경제 상황이 악화될수록, 사회 내 갈등과 차별은 더 노골적으로 표출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비교적 동질적인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한민족’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되새기게 된다. 같은 언어와 역사, 생활 문화를 기반으로 오랜 시간 함께 살아왔다는 점은 해외 여러 나라들과 비교해 보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이런 생각이 더 자주 든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인종이나 민족 때문에 차별을 겪을 일은 없다는 점이 큰 위안이 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단지 국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결국 나 자신과 내 아이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써온 기록들
《경계에 선 나라들 : 강대국 사이에서 길을 만드는 나라들》, 뷰크크
세계는 우리 삶과 맞닿아 있다
나는 세계 정치와 경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 모든 흐름이 결국 나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은 과거처럼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지 않는다. 오히려 글로벌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에 더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자유와 개방을 확산시키기보다는 지정학적 영향력을 지키기 위한 힘의 논리가 더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중국 역시 주변 국가에 대한 압박을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면, 중국은 과거에도 힘으로 주변을 억누르려 할 때마다 오히려 외부의 지속적인 침략과 내부 혼란을 겪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현재의 전략은 과거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얻지 못한 선택으로 보이기도 한다.
일본은 여전히 제국주의적 야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과거 식민지 시절 수많은 생명을 빼앗고도 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반성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최근에는 군사적 역량 강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동북아시아 정세에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
그리고 남한 역시 점차 통일에 대한 관심을 잃어가고 있다. 북한 주민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자기 삶을 지키는 데만 몰두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 민족으로서의 연대와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북한에 대해서는 별도로 언급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그곳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체제 유지를 위해 국민의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를 보여 왔다. 나는 그런 위정자들이 더 이상 이 지구 위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써온 기록들
《돈을 굴리는 모든 방법》, 뷰크크
《주식은 도박이다 : 초보자에게 보내는 냉정한 조언》, 뷰크크
인간은 결국 신을 향한다
나는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다.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 불교처럼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들뿐 아니라, 나처럼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조차 ‘신’이라는 개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끊임없이 마주하게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우주와 시간, 존재의 이유와 목적 같은 질문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보다 더 큰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이 꼭 신이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그런 존재를 상상하고 질문하게 되는 일은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신이 실제로 존재해서라기보다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사유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다시 찾다
인간과 자연은 본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동양의 전통적인 사유 속에서도 자연과 인간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는 삶의 일부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근대 이후 서구 문명이 도입되면서 이런 조화의 개념은 점차 약화되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주인이라는 사고방식이 자리 잡았고, 자연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대상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식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 파괴를 불러왔고, 오늘날 우리는 그 결과로 기후 위기와 생태적 불균형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보는 사고는 인간 스스로의 생존 기반을 위협하게 되었고, 결국 다시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오래된 질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나는 아이들을 위해 책을 썼다. 글을 쓴다는 일, 그리고 그것을 책의 형태로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작업은 참으로 뜻깊은 경험이었다.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을 정리해 아이들에게 직접 전해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글쓰기는 충분히 보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아이들을 위해 두 권의 책을 만들었다. 첫 번째 책은 ≪아빠의 잔소리≫ 라는 제목으로,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전하고 싶은 조언을 짧은 글들로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자가출판으로 두 권을 인쇄해 아이들의 생일 선물로 건넸다. 그리고 저녁마다 한 꼭지씩 소리 내어 읽도록 했다.
아이들에게 올바른 마음가짐을 알려주고 싶어서 ‘명심보감’ 같은 고전도 찾아보고, 다른 작가님들의 글도 읽어보았지만, 현대적인 감각과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기에는 아쉬움이 컸다. 그래서 결국, 내가 직접 쓰기로 했다. 짧게는 10분, 길게는 15분. 저녁 시간마다 아이들이 글을 읽는 모습을 보면서 나름의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 책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보자≫ 라는 제목이다.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주기 위한 글로, 아이들이 문제 앞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려 했다. 이것은 그동안의 사회 경험으로 느낀, 인생에서 꼭 필요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사실 문제 해결은 능력이라기보다 하나의 습관이자 과정 같은 것이다.
저녁때마다 조금씩 시간을 내서 아이들에게 읽히고, 그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초등학생인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다 보니 글이 다소 어설프게 느껴졌고, 좀 더 다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 해결이라는 건 결국 머리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기초적인 방법을 먼저 알려준 뒤에는, 조금 더 크면 아이들과 함께 문제를 푸는 과정을 같이 해보고 싶다.
이처럼 글을 쓴다는 것은 단지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가치를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일단 이 두 권만으로도 내가 평생 가르치고 싶었던 것들을 아이들에게 전달했다는 뿌듯함을 느낀다. 앞으로도 그런 기회가 또 있다면,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때그때 필요한 이야기를 책으로 정리해 다시 알려주고 싶다.
내가 써온 기록들
《아빠의 잔소리》, 뷰크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보자》, 뷰크크
어떤 글은 전적으로 나의 개인적인 생각을 담고 있다. 반면, 어떤 글은 독자에게 생각을 건네고 싶어서 쓴 글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몇몇 문제들은 결코 개인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은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같은 질문을 품을 때에야 비로소 변화의 가능성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고, 책을 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신하거나 모두에게 보편적인 해답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나의 언어로 풀어내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내가 다뤄온 이야기들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서로 다른 주제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어떤 글은 사회에 대한 것이고, 어떤 글은 개인의 감정이나 일상에 대한 것이며, 또 어떤 글은 역사나 미래를 다루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모든 주제는 하나의 방향으로 모이고 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라는 질문이 놓여 있다. 나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지, 무엇에 흔들리고, 무엇에 희망을 거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싶었다.
결국 내가 전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지식이나 이론,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통과해 드러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성찰이다. 그것이 내 글의 출발점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