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은 예언이 아니다

by 홍종원

나는 이전 글 <당신은 뉴스를 보시나요?>에서 통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쉽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전은 통찰을 이렇게 정의한다.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봄.”
또는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여 장면의 의미를 재조직화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


즉, 통찰이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 아니라, 그 이면에 얽힌 구조를 이해하는 일이다.




예전의 나는 통찰을 예언처럼 착각했다.
미래를 내다보는 초능력과 혼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일은 아무도 모른다>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단기적인 예측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장기적인 예측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이것은 단순한 의견이 아니다.
과학이 증명했고, 수학이 확인했으며, 역사가 수없이 보여준 변하지 않는 진리다.”


통찰도 이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상의 원리를 이해하면 가까운 시일 내의 일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먼 미래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통찰을 예언과 동일시하는 것은 착각이다. 통찰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그 답을 나는 드라마 《연인》(MBC, 2023)에서 찾았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사극이다.
전쟁 속 연인의 애틋한 사랑과 백성들의 생명력이 주제지만, 그 안에 통찰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사가 숨어 있다.


소현세자가 울분에 차 외친다.


“한편에선 전하께서 오랑캐의 비위를 맞추지 못해 침략을 당했다 욕하고,
다른 쪽에선 오랑캐의 비위를 맞추느라 허리를 굽혔다 손가락질한다.
대관절 어찌해야 저들이 전하를 능멸하는 것을 그만두겠는가!
어찌해야!”


이에 이장현이 담담히 답한다.


“아니옵니다, 저하. 전하께서 무능하여서 저들이 조선을 침략한 것이 아니옵니다.
소인, 저들과 오랫동안 장사를 하며 느낀 바로 저들은 명과의 결전이 다가올수록 후방의 조선을 견제하고, 조선의 식량과 병사를 얻기를 원했으니, 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조선을 침략했을 것이옵니다.
조선의 임금과 조정이 무능하고 나약해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말들은 그저 전쟁의 책임을 조선에 떠넘기려는 저들의 술책일 뿐이옵니다.
저하마저도 저들의 간교한 술책에 넘어가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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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사는 통찰을 잘 보여준다.
병자호란은 흔히 “임금이 무능했기 때문”이라 단순화된다.


하지만 청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청은 명과의 최종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후방의 조선을 제압해야 했고, 전쟁에 필요한 군량과 병력도 조선에서 얻으려 했다.


청은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조선을 침략했을 것이다.


이것은 임금 한 사람의 잘잘못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구조의 문제였다.
바로 이 구조를 꿰뚫어 본 것이 통찰이다.


역사는 같은 패턴을 반복했다.
거란, 여진, 몽골 모두 중국 본토를 치기 전 조선을 침략해 후방을 안정시켰다.


고려 때 거란은 송과 싸우면서 고려를 쳤다.
여진은 금나라를 세우며 고려를 압박했다.
몽골은 수십 년간 고려를 침략해 부마국으로 만든 뒤에야 남송을 향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병자호란.
청은 명과의 결전을 앞두고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은 단순히 굴복했느냐 무능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청에게 조선은 반드시 제압해야 하는 후방이었고, 동시에 군량과 자원의 창고였다.


현대의 우리는 교과서 속 문장을 통해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런 큰 그림이 쉽게 보이지 않았다.


전쟁은 언제나 왕의 외교 실패, 조정의 무능으로만 설명되곤 했다.
만약 그 시대에 누군가 이 구조를 정확히 읽어냈다면, 그는 분명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라 불렸을 것이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그런 눈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통찰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책임이 아니라, 사건의 이면에 숨어 있는 구조를 파악하는 힘.




비슷한 장면은 드라마 속 또 다른 대사에서도 나타난다.
당시 청은 명에서 귀화한 장수들을 중용했지만 그들의 충성을 믿지 못했다.
경중명 역시 그런 처지였다.


전쟁을 이어가려면 군량이 가장 중요했고, 장수들은 이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증명해야 했다.


창고 앞에 선 경중명은 고민에 빠졌다.
쌓인 곡식은 곧 상할 터였고,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였다.
그때 이정혁이 말했다.


“우리 쌀을 먼저 금주로 나르고 나중에 조선의 쌀로 받으라?”


경중명이 묻자, 이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장군. 이제 장군의 성에 쌓인 쌀 수천 석은 해가 넘어가면 좀이 슬 것입니다.
그러니 쌀이 상하기 전에 먼저 금주로 보내고, 나중에 조선의 햅쌀로 받으심이 어떠실는지요.”


경중명은 잠시 미소 지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하나 그리는 못하겠소. 군량을 나르기로 해 놓고 기일에 맞추지 못하면 그 불똥이 나에게 튈 거야.
그렇게 할 수야 없지.”


이정혁이 바짝 다가섰다.
“하면 고방의 쌀을 썩히시렵니까?”


경중명은 흔들렸지만 다시 단호히 말했다.
“쌀이 썩더라도 폐하의 미움을 사는 것보다는 낫겠지.
나는 명에서 넘어온 사람이야.
당분간 흠 잡힐 행동을 할 수는 없어.”


그러자 이정혁의 목소리가 더 깊어졌다.
“장군. 용골대 장군이 왜 저를 따라왔는지 아십니까?
조선인인 저를 믿지 못하고, 명에서 건너온 장군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폐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명과의 전쟁 중이라 귀화한 장군을 곁에 두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과연 곁에 두시겠습니까?
군량은 폐하께서 무엇보다 중하게 생각하는 일입니다.
지금이 바로 장군의 쓸모를 증명할 기회입니다.
흠잡힐 일을 피하려다 이 기회를 놓치시겠습니까?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폐하의 신임을 얻으시겠습니까?”


곡식을 어떻게 할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군량은 전쟁의 생명줄이자,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할 무대였다.


이정혁은 눈앞의 곡식이 아니라 권력과 신뢰의 구조를 꿰뚫어 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통찰이다.




통찰은 결국 현재를 꿰뚫어 보는 눈이다.
멀리 있는 미래를 예언하는 눈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진실을 놓치지 않는 눈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그런 눈을 가지고 있을까.
작게는 우리의 일상과 선택에서,
크게는 미국과의 관세 문제, 세계 경제의 불안,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과 갈등 속에서 말이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 뒤에는 언제나 감춰진 구조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려 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표면만 쫓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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