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은 가능한가, 아니면 환상인가

by 홍종원

나는 이미 여러 번 말했다.
장기적인 미래 예측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통찰은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기 전, 나는 예측과 통찰을 혼동하며 길을 찾고 있었다.


한때 나는 책을 찾아 헤맸다.
세상을 꿰뚫는 눈을 주고, 마음을 열어 줄 책.
그런 책만 있다면 나도 놀라운 통찰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수많은 책을 탐독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완전한 통찰’ 같은 건 없다.
정말 미래의 방향을 짚어낼 수 있는 눈이 있을까?
지금의 나는 오히려 묻는다.


통찰이란 과연 가능한가.
아니면 우리가 바라는 환상일 뿐인가.




앞선 글 <통찰은 예언이 아니다>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청은 명과의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후방의 조선을 제압해야 했고, 전쟁에 필요한 군량과 병력도 조선에서 얻으려 했다.
청은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조선을 침략했을 것이다.
이건 임금 한 사람의 잘못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구조의 문제였다.
바로 이 구조를 꿰뚫어 본 것이 통찰이다.”


우리는 이미 역사의 결과를 알고 있으니 이 설명을 쉽게 이해한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보았을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조선 내부에서 “청이 명과 싸우려 조선을 반드시 제압한다”는 구조적 통찰을 언급한 기록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왕이 무능했다”거나 “외교가 실패했다”는 책임론에 치우쳤다.


물론 단서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정묘호란 직후 일부 대신들은 “청이 명과 싸우는 과정에서 조선을 건드렸다”는 해석을 남겼다.
병자호란 이후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청의 전쟁 준비를 직접 목격했으니 어느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기록은 드물다.
오히려 청나라 쪽 기록에는 뚜렷하게 남아 있다.
홍타이지는 “조선은 후방을 위협할 수 있다. 반드시 제압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조선 내부의 통찰은 희미했지만, 청의 시각에서는 구조적 인식이 명확했다.


결국 다수의 조선 사람들은 전쟁을 왕의 무능과 조정의 실수로만 설명했다.
그래서 드라마 《연인》 속 이장현의 대사가 특별하다.
실제 역사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적 통찰을, 허구의 대사가 대신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뉴스만 틀어도 문제들이 쏟아진다.
물가는 오르고, 부동산은 불안정하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세계 경제를 흔들고, 한반도는 여전히 안보 위협 속에 있다.
여기에 고령화, 기후 위기, 전염병까지 겹친다.


이 가운데 단 하나라도, 가까운 미래를 확실히 내다볼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통찰’이라고 부르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2006년, 경제학자 루비니는 미국 부동산 거품과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을 집요하게 지적했다. 모두가 낙관에 취해 있었지만 그는 “거품이 꺼지면 은행이 무너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한동안 무시당했으나,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자 사람들은 그를 “닥터 둠”이라 불렀다.


2005년, 전염병 전문가 오스터홀름은 SARS와 에볼라 사례를 분석하며 “세계화된 사회가 전염병에 취약하다”라고 경고했다. 그때는 과장된 걱정으로 치부되었지만, 코로나 팬데믹이 닥치자 그의 말은 다시 빛났다.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은 미중 경쟁을 두고 “투키디데스 함정”이라는 말을 꺼냈다.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패권 충돌이 고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처럼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때는 논쟁거리였지만, 지금은 무게 있는 분석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이런 사례를 두고 “위대한 통찰”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들조차 절대적 확신을 가진 건 아니었다.
루비니는 “가능성이 높다”라고 했을 뿐이고, 오스터홀름도 “언젠가 일어날 수 있다”라고 했다.
앨리슨 역시 “필연은 아니지만 위험이 크다”라고 말했다.


즉, 그들은 여러 시나리오 중 가능성이 높은 길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실제와 맞아떨어지자, 우리는 그것을 통찰이라 불렀다.


나는 이것이 통찰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통찰은 미래를 꿰뚫는 초능력이 아니다.
현재를 해석하며,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를 내놓는 일이다.
그중 일부가 시간이 지나 ‘맞았다’고 불리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등불 하나 들고 어둠 속을 걷는 사람과 같다.
멀리 앞길은 보이지 않지만, 발밑 한 걸음은 비출 수 있다.
어쩌면 더듬이로 길을 찾는 개미와도 같다.


등불.png


내가 찾던 통찰, 즉 현상의 이면을 꿰뚫는 능력은 어쩌면 이상일뿐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바람처럼 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통찰은 가능한가, 아니면 환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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