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인간은 왜 존재 의미를 알지 못하는가

by 홍종원

생명은 유전자의 설계도에 따라 태어난다. 개체는 태어나는 순간 고유한 몸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 생존에 필요한 구조와, 그 구조를 움직이게 하는 기본적인 본능만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부모가 축적한 경험, 관계에서 얻은 지혜, 세상에 대한 해석과 의미는 전해지지 않는다. 새 생명은 언제나 완전히 새로운 백지상태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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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은 생존의 최소 단위를 책임진다. 갓 태어난 새끼 거북이 본능적으로 바다로 향하고, 거미가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고 거미줄을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본능은 단지 반응의 규칙이지, 삶의 방향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어디서 살아야 하는지, 누구와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생명은 구조와 반응만을 물려받고, 해석과 의미는 스스로 부여하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 역시 유전자에 따라 몸과 몇 가지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하나의 결정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본능을 관찰하고 거스를 수 있는 지능이다. 다른 동물은 본능을 따르며 살아가지만, 인간은 그 본능에 질문을 던진다. 본능은 단순히 말한다. “살아라.” 그러나 인간의 지능은 묻는다.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인간만이 겪는 고통의 시작점이다. 대부분의 동물은 삶을 해석하지 않는다. 생존과 번식, 그리고 환경에의 적응이 전부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른 채 살아야 하는 존재다. 이 질문은 해답이 없기에 고통스럽고, 피할 수 없기에 더 절박하다. 지능이 진화하면서 인간은 생존 그 이상을 묻기 시작했고, 거기서부터 고통도 함께 태어났다.


이 질문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먼저 자연이 생명에게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하도록 설계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진화는 생명에게 절대적인 진리를 유전하지 않았다. 유전되는 것은 구조와 반응의 경향성일 뿐이다. 자연은 생명에게 “이것은 옳다”거나 “이것이 목적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극에 반응하고, 환경과의 차이를 감지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절대는 유전되지 않고, 오직 상대만이 유전된다.


모든 생명은 환경의 절댓값을 인식하지 못한다. 크고 작음, 따뜻함과 차가움, 밝음과 어두움조차도 기준이 아니라 차이로 느껴진다. 이런 상대적 인식은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게 해 주며, 생존에 유리한 전략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상대 속에서 절대적인 것, 변하지 않는 것, 모든 것을 설명해 줄 단 하나의 의미를 갈망한다.


그런데 자연은 그런 절대를 주지 않았다. 그 어떤 존재도 태어날 때부터 “무엇이 옳은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알고 태어나지 않는다. 이 구조는 유전자의 한계가 아니라, 진화 시스템의 전략이다. 절대적 가치가 유전된다면, 생명은 변화하는 환경에 스스로를 조정하지 못하고 멈추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전략 너머를 보게 된 존재다. 절대를 인식할 수는 없지만, 절대를 상상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이 인간 정신의 역설이다. 인간은 상대 속에서 절대를 꿈꾸는 유한한 존재다. 지능은 본능을 넘어 사고의 지평을 확장했지만, 정작 그 지능이 묻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자연으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진화는 목적을 가지지 않고, 유전자는 방향을 설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이 틈에서 신이 등장하고, 신화가 생겨났다.


그래서 인간은 고통스럽다. 본능은 “살아라”라고 말하지만, 지능은 “왜 살아야 하느냐”라고 묻는다. 이 갈등은 단지 내면의 고민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류가 신화를 발명하고, 윤리를 고민하고, 예술을 창조하게 만든 힘이다. 의미를 알지 못하기에 인간은 의미를 만든다. 그렇게 절대에 다다르지 못한 존재는 그 빈자리에 스스로의 이야기를 채워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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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기준 없이 세상을 해석하는 일은 괴롭다. 하지만 그 고통은 동시에 자유이기도 하다. 주어진 목적에 복종하지 않아도 되는 삶, 스스로 방향을 설계하는 존재. 인간은 생명 중 가장 능동적인 위치에 서 있다. 의미는 유전되지 않았지만, 그 창조는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처럼 남겨졌다.


인간은 고통받는다. 그러나 그 고통은 무지 때문이 아니다. 의미를 찾으려는 의식의 노력, 질문하는 존재로서의 숙명이 인간을 괴롭게 만든다. 자연은 해답을 주지 않았고, 대신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인간은 그 질문 속에서 절대를 꿈꾸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상상한다.


우리는 신의 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신을 만들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으나 스스로 의미를 짓는다. 본능에 끌리면서도 그 본능을 성찰하고, 상대 속에 머물면서도 절대를 향해 고개를 든다. 우리는 그렇게 이 세상에 던져졌고, 그 속에서 의미를 만들며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다.
이 모든 것은 인간에게 내린 신의 형벌인가? 아니면 인간에게 준 자유인가? 그도 아니면, 단지 자연의 실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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