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새벽에 잠이 깨어 진한 커피를 내렸으니 다시 잠들기는 글렀습니다. <헤어질 결심>에서 사용된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은 베토벤의 운명보다 더 처절하게 운명을 노래합니다. 조금 쌀쌀하고 비가 오는 날 강가에서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앞에 두고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지그시 감고 과거를 회상하며 들을 때 효과가 극대화되는 음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의 ‘운명’이란 사주팔자나 운세, 운수에서의 운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벗어나고 싶지만 그것에 따를 수밖에 없을 때, 그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안락의 길을 벗어나는 것일 때의 그런 ‘운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은 때로 ‘신의 명령’으로, ‘업보’로, ‘도의 미묘한 작용’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이런 운명의 작용에 더 민감하고 그에 따르는 사람들은 신의 종, 철학자, 위인, 예술가 등으로 불려 왔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고 그것을 말하고 표현하고 실행한 사람들입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왜 그런 식의 작품인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그들의 답은 단순히, “그럴 수밖에 없다.”였으며 이는 결국 운명의 작용입니다.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가며 스스로 유리한 대로 상황을 해석하고 자기 만족 속에서 유유히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들은 일상을 넘어서는 신의 목소리, 존재의 진리, 시대의 사명을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상을 넘어서서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결국 자신을 휘몰아치는 운명에 몸을 맡기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대체로 그들의 시대가 끝난 후, 일이 모두 이루어진 후에 비로소 감지되고 인정되곤 합니다. 그래서 운명은 씁쓸하고 처연하고 나아가 비극적으로 느껴집니다.
일상을 살아가지만 되돌아보면 운명에 따른 순간이 있었고 모두가 비슷비슷한 사람들이지만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지하고 그들을 돕는 사람들 역시 존재합니다. 그래서 운명에 따르는 것이 많은 경우 비극적이고 실패로 끝나지만 위대한 순간들이 실현되고 위대한 삶과 작품들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운명의 순간에는 늘 싸움이 존재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하지만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예수의 기도에서와 같은 싸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의 판단과 의욕을 결국 내려놓고 순종했습니다. 물론 그것조차 스스로 한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의미에서 ‘운명’이라 말하지만 말입니다.
쓸쓸하고 처연한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을 ‘운명과 회상’이라 저는 명명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