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재회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산을 오르던 어린 시절부터, 군인의 신분으로 작전에 나섰을 때도,
그리고 다큐팀과 함께 촬영하던 날에도 지나쳤던 길.
그런데도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공기는 묘하게 더 무거웠다.
흙냄새는 전보다 무겁고 축축했으며,나뭇잎 사이를 스치는 바람은 소리보다 결이 먼저 느껴졌다.
멀리선 관광객들의 웃음소리와 안내 방송이 흐릿하게 들렸다.그러나 몇 걸음만 안으로 들어서자,
그 모든 소리는 갑자기 뚝 끊겼다.
둘레길에서 멀어진 지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윤성은 다른 계절로 넘어온 느낌을 받았다.
빛이 달랐다. 공기의 속도가 다르고, 풀잎의 숨소리조차 낯설었다.
이곳은 기록된 자연이 아니라, 잊힌 자연이었다.
작은 풀숲 하나, 나뭇가지 하나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여기를 먼저 지나간 것만 같았다.
인간이 만든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길이 있는 듯 했다,
이 산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바람결에 흙내와 이끼 냄새가 섞여 들었다. 윤성은 고요한 산등성이에 한 발짝 더 내딛었다. 발밑의 낙엽들이 눌리며 사각 소리를 냈고, 그는 무의식중에 숨을 죽였다. 도시에서는 들을 수 없던 고요였다. 아니, 고요라기보단 '비어 있는 듯한 긴장감'에 가까웠다.
그 순간이었다.
윤성은 배낭을 다시 고쳐 멨다.
그리고 창살 너머,
그늘 깊은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텐트를 친 건 능선 남쪽 경사면, 예전에 군사작전 당시 대기조가 머물렀던 곳과 가까운 곳이었다.능선의 시야를 확보하긴 좋지만, 다른 곳에선 잘 보이지 않도록 살짝 움푹한 그 지형은 은신처로썬 더할 나위 없었다.
윤성은 그곳에 텐트를 치고 위장망으로 덮었다.
낮에는 가을 햇볕이 숲 사이로 고르게 들었지만, 해가 기울며 서늘한 기운이 바닥부터 차올랐다. 나무들 틈엔 바람 한 점 없었고, 죽은 가지들이 바스락거리며 무언가 스치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는 익숙한 듯 행동했지만 손끝은 떨렸고, 숨은 얕고 고르지 않았다.
윤성은 텐트 안에 앉아 한쪽 귀퉁이를 열어 밖을 살펴보며 귀를 곤두세웠다. 도시에서 가져온 장비는 두고 왔다. 조용하고, 작은 것만 챙겼다. 오직 맨눈과 손끝, 그리고 감각만으로 산과 마주하고 싶었다. 고요 속에서 심장의 고동만이 유독 크게 들렸다.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척이 스쳤다. 바람인가 했지만, 아니다. 줄톱으로 쇠를 긁는 듯한 거친 숨소리. 마치 나무껍질을 긁는 듯한 마찰음. 고개를 돌린 순간, 나뭇가지 사이로 커다란 황색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황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떠올랐을 때,
윤성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솟아났다.
그것은 언어로 부를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마치 먼 옛날 잊힌 기도의 마지막 행을 다시 읊는 순간처럼.
고요하고, 무겁고, 거룩했다.
그는 움직이지도, 숨도 쉬지 못한 채 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너머엔, 이 세상과는 다른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호랑이의 눈이 천천히 사라지고, 숲이 다시 고요를 되찾자 윤성은 그제야 숨을 들이켰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어쩐지 안에서부터 차분해지는 감각이 밀려왔다.
그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방수 수첩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얇은 수첩, 군 시절부터 늘 배낭 안에 함께 있었던 물건이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펜을 뽑아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그는 잠시 멈췄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단어가 스쳤지만, 아무 것도 적절하지 않았다.
그래도 펜은 움직였다.
무릎 위에 올려놓고 펜을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머릿속에 수많은 단어가 번개처럼 스쳐갔다가, 금세 녹아 사라졌다.
펜 끝이 허공에서 망설였다.
그러나 곧, 이유를 알 수 없는 힘이 손목을 끌었다.
종이 위로 잉크가 번지기 시작했다.
2025. 11. 12.
남쪽 능선 대기지점 인근, 고사목 뒤쪽.
23시 14분경. 시야 내 접촉.
황색의 눈동자. 정면 응시.
글자를 적으며, 윤성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나뭇잎 사이로 달빛이 부서지고 있었고, 산의 냄새는 여전히 깊고 무거웠다.
그는 수첩을 덮었다. 기록은 짧았지만, 오늘 이 밤은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진실했다.
윤성은 발걸음을 빨리 하여 빠르게 하산했다.
산 아래, 마을은 조용했다.
그는 말없이 내려왔고, 사무실에선 명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명아가 따뜻한 차를 내밀며 물었다.
“산에… 뭐가 있었어요?”
윤성은 주머니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조용히 수첩에 기록한 글을 그녀에게 보이며 말했다.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었어요.
위에서 아래로 눌린 흔적.
살아 있는 무게.”
아무도 묻지 않았고,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윤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사이엔 그 짐승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충분했다.
그 밤, 그 말.
그건 그들만의 암호였고, 그것이 아직 거기 있다는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