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돌아온 발자국
한반도라는 작은 틀 안에서 인간의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일부 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실제로 산골 마을에선 염소, 닭 등 가축이 없어지고 밭두렁에서 어른 주먹 두 개가 들어가고도 남는 큰 발자국이 발견될 때면 ‘산신님이 다녀가신 게지…’ 하며 체념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마을 어귀엔 ‘산짐승 출몰 주의’라는 현수막이 내걸렸고,
마을 방송에선 수시로 산 아래 경계 구역 출입금지를 알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런 날 저녁이면 아이들은 무리지어 ‘산신님이 잡아간다. 꼬마야 집에가라.’라는 노래를 불러대곤 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짐승을 신으로 대하며, 신을 피하면서도 곁에 살았다.
그것이 오래된 공존의 방식이었고,
어쩌면 지금 이 땅에서 가능한 유일한 평화였다.
그러나 영원한 평화는 없는 법, 강원도 깊은 산골의 산그늘 마을에는 그 평화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12뭘의 어느 날 초겨울치고는 많은 눈이 며칠째 내리던 어느 날 이른 아침부터 외출금지를 알리는 경고음이 마을에 울려퍼졌다.
몇주 전부터 마을 외곽 지역의 닭장에서 닭이 한두마리씩 없어지고, 닭장의 울타리가 찢어진 흔적이 발견되어 삵 또는 족제비의 소행이라 여겼다.그러나 그날 아침엔엔 닭장의 찢어진 자리에 덧대여있던 나무 판자에 발톱자국과 함께 누런 털 몇 가닥이 떨어져 있었다.호랑이었다.
‘호랑이가 마을에 내려와 닭을 물어갔다,’ 이 사실은 단지 닭 한마리를 잃은 것 이상의 문제였다. 초겨울이라 호랑이가 산 속에서 먹이를 구하기 힘들어졌고 또 언제든 먹이를 구하러 마을에 내려올 수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리는 눈이 조금씩 거세지던 어느 날 사건은 일어났다. 매일 아침 첫 닭이 울기 전 자기 집 앞은 물론 마을 버스정류장 앞까지 청소하며 빗자루질하는 소리로 마을을 깨우는 정 노인이 보이지 않자 이장은 이상함을 느꼈다.이장은 불길한 예감이 틀리기를 바라며 길을 나서 마을 외곽 산기슭에 위치한 정노인의 집으로 향했다. 덩그러니 놓인 파란 대문이, 숲으로 스며드는 외길 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문에 다가갈수록 문 안에서 낑낑대는 백구의 소리가 선명해졌고, 이장은 문을 열기도 전에 정노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문을 열자 하얗게 눈이 쌓인 마당 한가운데 내복만 입은 정 노인이 가슴을 부여잡은 채 쓰러져 있었다.반쯤 감은 눈꺼풀에 조금 쌓인 눈만이 이미 정 노인이 숨을 거둔지 시간이 꽤 흘렀음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장은 경찰과 2119에 신고를 하며 집 주위를 둘러보던 중 정 노인의 집 뒷마당에서 주먹이 들어가고도 남는 커다란 고양이과 동물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해가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할 무렵 도착한 경찰과 구급대원은 정 노인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분석했다. 아마 마당의 백구가 짖자 이상함을 느끼고 뒷마당을 살펴보다 마당에서 호랑이와 마주쳤고, 깜짝 놀란 나머지 변을 당한 것 같았다.
이장은 문득 어린 시절에 마을 어른들이 하던 말을 떠올렸다. ‘산신님을 마주치면 눈을 마주치면 안돼.그 눈빛에 압도당하고 나면, 온 몸이 그대로 굳어 버리거든.’이장은 문득 어린 시절에 마을 어른들이 하던 말을 떠올렸다. ‘산신님을 마주치면 눈을 마주치면 안돼.그 눈빛에 압도당하고 나면, 온 몸이 그대로 굳어 버리거든.’
정 노인의 장례식은 마을 회관에서 조용히 치러졌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장례식을 준비하던 이장은 군복 차림의 한 젊은 청년을 보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구만 윤성이,이젠 다 큰 청년이 됐구먼. 요샌 어떻게 지내나?”
“특전사 장교입니다.”
“군인이라. 어릴때부터 그렇게 산속을 헤집고 다니더니 어울리는구먼. 허허”
“군인만큼 산을 가까이에서 느끼기 좋은 직업이 없더라구요.”
정 노인의 손자 윤성은 유년기를 정노인 집에서 보냈고 성인이 된 뒤에도 여러 차례 마을을 찾았기에 이장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어릴 때부터 약초꾼인 할아버지를 따라 산에 오르내리곤 했던 윤성은 어른이 된 지금도 매 주말이면 꼭 산을 오르는 산쟁이가 되어 있었다.
윤성은 조용히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에 눈을 맞춘 뒤 고개를 숙여 잠시 눈물을 훔치고는 빠르게 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완장을 차고 상주 역할을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눈을 피하듯 시선을 떨구고 조용히 향을 피웠다.
허나 속은 복잡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죽인 거잖소.”
“직접 물어 죽인 것도 아니고 꼭 호랑이 때문에 죽었는진 알 수 없잖아요.”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 명쾌히 결론짓지 못한 채 갑론을박했다.
이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라는 존재를 산신이라 여기며 살아왔기에 감히 그 존재를 인간이 어떻게 해도 될지에 대한 토론의 결론은 쉽게 나지 못했다.
정 노인의 마지막을 비추던 달과 같은 모양의 달이 다시 떠오를 무렵 그 결론을 내는 데 도움을 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가장 산과 가까운 밭에서 한 아낙네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번엔 커다란 발자국이 발견된 것은 물론 뒷목 쪽에 깊게 파인 이빨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더 이상 ‘심장마비’로 둘러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