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닫고, 색을 열다

마지막 장

by Everett Glenn Shin

요즘은 문장보다 색을 먼저 떠올린다.

어떤 날은 옅은 회색이 하루를 덮고, 어떤 날은 분홍빛이 문득 가슴에 묻어난다.
사실 나는 원래 동물을 좋아했다.어릴 적부터 동물 다큐를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고, 지금도 화면 속 털의 결이나 눈빛만 봐도 숨이 고르게 내려앉는다. 그래서 서점에서 동물 그림을 따라 그릴 수 있는 책을 발견했을 때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36색 색연필을 사서, 하루에 한 마리씩 노트에 그려 넣기 시작했다.

내 그림은 여전히 삐뚤고 비율은 엉망이다.색도 깔끔하게 채워지지 않는다.하지만 이상하게, 그 엉망인 그림을 그리고 나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동물 한 마리를 그리는 동안에는 그 동물이 오늘의 내 마음을 대신 살아주는 것 같다.걱정도, 피로도, 복잡한 생각도 선 밖으로 삐져나간 색처럼 어딘가로 흩어진다.

얼마 전, 커피 향이 선명하게 느껴진 날이 있었다.그날 이후로 세상은 다시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색을 고르며 하루의 온도를 잰다.오늘은 노랑이 조금 더 뜨겁다.그림은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그저 나에게 돌아오려는 방식이 되어 주었다.

오늘은 단풍을 보고 왔다.
처음 재활을 시작했을 때 창밖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운동을 하며 꽃구경을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단풍이 질 때엔 꼭 보러 가리라’ 다짐했었지만 결국 1년이 넘게 걸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다짐은 아직 뜨겁게 남아 있었고, 그래서 오늘 내가 보았던 바람에 흔들리는 빨간 단풍은 더 뜨거운 온도의 빨강으로 다가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늘의 빨간 단풍은 단순한 계절의 색이 아니었다.
지난 재활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빛으로 번지는 듯했다.
잎사귀가 흔들릴 때마다 그 움직임을 따라 내 마음도 조용히 되살아났고, 나는 그 앞에서 그저 숨을 고르듯 서 있었다.

아직 색연필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색.
36색의 어디에도 없는,
오늘의 바람과 나의 회복이 포개진 색.
언젠가 이 단풍도 그려보고 싶다고, 오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 책은 여기서 잠시 덮어두려 한다.
더 이상 쓸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글로 적기보다 그림으로 먼저 그리고 싶은 순간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음 계절이 오기 전에,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릴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 속에서 다시 이야기가 태어난다면,
그것이 다음 책의 첫 장이 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커피를 마시며 나를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