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의 대화는 늘 생각지 못한 곳으로 나를 데려간다.
그 작은 한마디가 오래 묵혀 둔 나의 기억과 감정을 흔들어 깨우기도 한다.
식사 준비로 바쁜데 딸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는 철이 없는 것 같아요.”
나는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그런 것 같아. 근데… 왜 꼭 철이 들어야 하니?
철든 사람과 만나는 상대는 편할지 몰라도, 정작 철이 든 당사자는 힘들지 않겠니?”
딸아이는 “엄마는 특이해”라고 말했다.
대부분은 ‘아니야, 너 철들었어’ 라며 아이를 다독인다는데,
나는 그런 대답 대신 내 안의 오래된 감정을 꺼내는 말이 나왔다.
사실 그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른 것은, 나의 지난 시간이었다.
우리 집 5남매는 유난히 자기 의견이 뚜렷하다.
어릴 적 확실한 부모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늘 바빴고, 챙겨주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그게 미안했고, 때로는 후회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은 제 힘으로 각자의 길을 만들어갔다.
막내는 군대를 제대하고, 큰아이와 둘째는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잘 잡아가고 있다.
셋째부터 다섯째는 대학생활 속에서 진로와 거주 문제까지 직접 선택하고 결정한다.
부모인 나는 그저 옆에서 지지하고 믿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학창 시절, 나는 아이들에게 명확한 기준을 전달하지 못해 불안했다.
그런데 그 불안이 바로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하게 되는 힘이 되었다.
엄마 아빠의 ‘안전한 대답’을 듣기 어려웠던 환경은,
질문보다 선택에 익숙해지는 훈련의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반복은 결국 사회에서 “적응력이 좋다”,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나다”라는 평가로 돌아왔다.
부족함이 훈련의 도구가 된 셈이다.
반대로 나는 너무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님의 지지와 지침 속에 안정적으로 성장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수많은 선택 앞에 서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많이 당황했고, 무척 버거웠다.
시대와 환경이 다른 부모님께 질문하는 일은 ‘철든 행동’처럼 보였다.
효녀라는 이미지는 얻었지만, 늘 어딘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나를 따라다녔다.
부모님이 어떻게 생각할지 먼저 헤아려야 했기에
머릿속은 늘 복잡했고, 내 마음은 점점 멀어졌다.
그러다 문득 알게 되었다.
내 삶의 질문은 각 분야의 전문가에게 묻는 것이 맞다는 사실을.
그 이후로는 부모님과 의견과 달라도 마음이 자유로워졌다.
전문가와의 상담은 오히려 부모님과 더 가볍고 편안한 대화를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아이들이 나와의 대화에서 자유롭고 자신만의 색깔을 당당히 표현하는 이유를.
그들은 스스로 해석하고 선택하고 시도해본 경험을 통해 자기 삶의 주도권을 자연스럽게 얻어갔던 것이다.
아이들과의 대화는 지지와 믿음이 기본이다.
나는 인생을 조금 먼저 살아본 사람으로서 지혜를 나눌 뿐,
세세한 결정은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와 환경 속에서 스스로 해낼 것이다.
그날 딸에게 했던 말,
“철이 왜 들어야 하지?”라는 질문은 사실 오래전부터 나에게 하고 싶던 말이기도 했다.
철이 드는 순간보다 더 중요한 건,
각자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 나갈 용기를 잃지 않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