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주는 정 말하지 않는 배려

다시 생각해 본 성탄

by 한정희


교회 모임에서 일본인 교수 자매의 고백을 들었다. 예배후 나눔의 시간에 일어난 일이다.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한 지 10년, 한국인 남편과 30년을 함께 살아온 분이다. 우리는 그동안 그녀에게 친절하다고 생각해 왔다. 질문을 받으면 성심껏 답하고, 아는 것을 나누는 것이 정이고 배려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이젠 힘들어요.”
나는 먼저 당황스러웠다.
우리는 분명 잘해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나서야, 내가 몰랐던 결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설명은 이랬다. 일본에서는 누군가에게 조언이나 설명을 건네기 전에, 그 말이 상대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도 되는지 먼저 묻는 것이 배려라고 한다. 더 놀라웠던 건 이 부분이었다. 본인이 질문을 했더라도, 답변하는 사람은 곧바로 답하지 않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도 될까요?”라고 다시 묻는다는 것이다. 질문과 답변을 분리해 생각하고, 답조차도 허락을 구하는 문화라는 말에 나는 놀라움을 느꼈다.
그녀는 이 차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는 한국이니까 내가 이해하고 30년을 참고 살아왔다고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아는 것이 점점 사라지는 느낌 속에서, 이제는 더 이상 참을 힘이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그 고백 앞에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어쩌란 말이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새로운 세계 앞에서 느끼는 낯섦이 그대로 올라왔다.


며칠 전, 교실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경계성 자폐 성향이 있는 9세 남학생과의 수업 시간이었다.
쉬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였다. 나는 그 아이를 배려한다고 생각하며 충분히 쉬게 해 주었고, 아이는 칠판에 그림을 그렸다. 수업이 시작되어 그림을 지워 달라고 했을 때, 나는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아이는 울며 억울하다고 했다.
그 아이에게 문제는 ‘칠판을 지웠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자기 하루의 시간표에서 정확히 계산된 2분이 사라졌다는 손실감, 그로 인해 이후의 순서가 어긋났다는 감각이 억울함의 이유였다. 그 2분은 밥 먹는 시간을 밀리게 했고, 가장 기다리던 게임 시간을 줄여버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또 한 번 당황했다.
‘이게 왜 이렇게까지 억울한 일이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이 아이는 다른 계산법으로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일본인 교수님의 이야기와 9세 아이의 울음 사이에서,
서로 너무 다른 세계 앞에서,
그래서… 난 어쩌란 말이지?
말을 해야 할까, 멈춰야 할까.
알려줘야 할까, 기다려야 할까.


이 낯섦 앞에서 나는 어떤 반응을 선택해야 할까.
성탄을 앞둔 요즘, 이 질문은 더 깊어졌다.
아기 예수는 말과 답을 들고 오지 않았다.
정답을 설명하러 오지도 않았다.
그저 가장 낮은 자리로, 말구유로 내려오셨다.
혹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태도는
완벽한 이해나 즉각적인 설명이 아니라,
이 낯선 세계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잠시 멈춰 서 있는 것 아닐까.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하는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
사랑은 내가 익숙한 세계로 상대를 끌어오는 일이 아니라,
내가 낯선 세계 앞에 조용히 서보는 일이라는 것.
말해주는 정과 말하지 않는 배려 사이에서,
그리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초등학교 2학년 학생 앞에서 새로운 도전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 불편한 일상으로 치부할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지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