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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Jan 27. 2023

서울 한 달 살기의 시작

일상에 낭만 한 스푼

“한 달간 서울에서 살지 않을래? 관리비 포함 30만 원, 어때.”


고향 친구 K가 연홍빛 구름 덮인 새벽 바다에서 함께 새해 일출을 보다 말고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K는 서울에서 대학원에 다니는 동시에 고향에서 건축 사업을 하는 중이기 때문에 고향에는 본가가, 서울에는 전세방이 있다. 겨울방학 동안은 본인의 사무소에서 일하며 홀로 사무소를 지키던 직원과 함께 있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K의 입장에서도 집이 비는 동안 전세 이자 부담도 덜고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말해 뭐 해. 지금 비행기 표 예매할게.”


서울에 왔고, 역시 좋다. 서울이 좋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까닭은 일상에서 벗어나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일상의 무게감에 해방되고 싶지 않은가. 특히 서울에 사람이 많아서 나를 향한 시선이 분산되는 것 같고 가볍다. 서울은 외롭지 않냐 한다. 그럼 반문한다. 고향에서는 외롭지 않았는가? 나는 원래 외로운 사람이다. 게다가 몇 없지만 해마다 꼬박꼬박 연락을 이어가는 친구들은 주로 서울에 있다. 나를 아껴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택적 시선이 좋다.


친구 K는 반대로 어마어마하게 고향을 사랑하는 애향인인데, 대학을 서울에서 나오고 대학원도 서울에서 다니게 되었다. 대학 친구들이 서울에 있어서 결혼식 같은 여러 행사마다 서울을 자주 방문한다. 어쩌다 보니 연애도 서울 사람과 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운명의 손이 K를 자꾸만 서울로 끌어당기는 것 같다. 그러나 K는 이 운명에 저항하고자 건축 사무소를 고향에다 차렸다. 지금은 서울과 고향을 반반 번갈아 머물며 살아간다.


K는 고향에 가면 땅 위에 별로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엄청 추운 날이 아닌 이상 바다에 들어가 있다. 스쿠버 다이빙이 이 친구를 ‘살려주는’ 취미이기 때문이다. 삶이 지독하게 힘들 때, 모든 게 다 염증이 난 가운데 딱 하나 싫어지지 않았던 것이 바로 다이빙이었다고 한다. 다이빙은 K에게 아무 의미 없던 삶을 관통해 이어준 이음줄 같은 것이다. 결국 바다가 가까운 고향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된듯하다.


K의 친구 N을 따라 섬이 있는 앞바다에 다이빙을 하러 간 적이 있다. 검은 웻슈트를 입은 내가 왠지 멋졌다. N은 미키마우스 모양의 귀가 달린 깜찍한 웻슈트까지 입었다. 섬으로 향하는 배에서 이마를 스치는 촉촉한 바람이 몽글몽글 부드러웠다. 날씨도 맑고 기분도 좋았다.


첨벙! 일 년에 몇 번 없을 정도로 시야가 좋다며 같이 간 일행들은 황홀해했다. 신나게 오리발을 펄럭이며 더 깊이 잠수해 형형색색의 물고기 떼를 찍느라 바빴다. 반면 나는 그런 생물체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산소통 하나에 의존해 물속에서 숨 쉬는 것이 익숙지 않으니 치열하게 호흡에만 집중했다. 살짝의 과장을 보태 해수면 다섯 뼘 아래에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프리다이빙까지 하는 전문 인어들 옆에서 혼자 인간으로서 고군분투했고, 뽀글거리는 물거품 속 눈앞은 깜깜하게 일렁거렸다.


불굴의 도전 정신으로 머리를 담그며 여러 번 잠수했지만, 그들처럼 깊은 바닷속으로 내려가기는커녕 해파리처럼 해류에 휩쓸려 둥둥 떠다녔다. 입술이 파래진 채로 자꾸 물 밖으로 나왔고, 결국 한 것이라곤 오징어처럼 바위에 늘어져 몸을 말린 것뿐이었다. 다녀오고서 감기에 걸렸다. 그 이후로 나도 친구도 함께 다이빙 가자는 얘기를 꺼낸 적 없다.


N이 보내준 영상과 사진을 통해 비로소 발밑에 있던 빛나는 다홍색의 산호초와 바위 동굴 안 게, 에메랄드 비늘의 물고기 등 생명력 넘치는 바다 안을 확인할 수 있었다. N의 말에 따르면 실물을 절반도 담지 못했다는 화면 안 바닷속 세상은 너무 아름다웠다. 고향을 사랑할 기회를 놓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다이빙을 잘했다면 이곳을 더 사랑할 수 있었을까.


설 연휴, 뉴스에서는 고향에 폭설로 비행기가 결항되어 많은 사람들이 발이 묶여있다는 보도가 한창이었다.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는 눈이 한 번 내렸다고 하면 덩덩 쿵따쿵 휘몰이 장단처럼 빠른 속도로 휘몰아치는 그곳의 눈보라가 익숙한지 –17도까지 내려간 서울의 추위를 더욱 걱정했다. 창밖을 보니 서울의 눈은 소복소복 포슬포슬 예쁘게도 내린다.


서울에 있으면서도 고향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나는 한 달 뒤 돌아간 삶을 또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사실 지역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언가 주체적으로 한 경험이 중요한 것 같다. 삶을 잘 살기 위해 잠깐 타지에서 쉬었더니, 시선 속에 잠겨 답답함에 몸부림 치는 내가 보인다. 다섯 뺨만 올라오면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데 말이다. 시선과 책임의 무게야 어떻든 간에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을 더 적극적으로 찾아야지. 그리고 이번 여름에는 다이빙보다 재밌던 윈드서핑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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