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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Oct 15. 2018

210 『밤으로의 긴 여로』 - 유진 오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
p191
에드먼드 : 보이지 않는 손이 만물의 베일을 벗기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한순간 우리는 만물의 신비를 보고, 그러면서 자신도 신비가 되는 거죠. 순간적으로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그러다 그 손이 도로 베일을 덮으면 다시 혼자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목적지도, 그럴듯한 이유도 없이 비틀거리며 헤매는 거죠! 전 인간으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갈매기나 물고기였더라면 훨씬 좋았을 거예요.

작가도 울고 배우도 울고 어느 노교수는 목 놓아 울었다고 했다. 적막과 침묵의 밤으로 들어가는 긴 여정에서 나도 울었다.

땅에 중독된 아버지, 마약에 중독된 어머니, 술에 중독된 형, 첫째에게 옮은 홍역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둘째의 기억을 짊어지고 사는 셋째 에드먼드.

자신의 아들 오닐 2세를 염려해 이 작품을 사후 25년 뒤에 공개하라는 유언을 남기지만 교수였던 아들이 50년에 자살하고 53년 유진 오닐이 사망. 그의 아내 칼로타가 56년에 스웨덴에서 초연을 올린다.

땅에 투자만 하고 가족에 인색했던 한물간 연극 배우 제임스 티론은 아내를 싸구려 진료의 희생자(마약 중독)로 만들고 잘못된 양육으로 첫째의 알콜 중독 구실을 제공했으며, 당시엔 위험했던 폐병을 앓는 막내의 요양까지 싸구려로 해결하려 한다.

이 희곡을 누구의 말처럼 화해, 이해, 용서와 감동의 결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잔인하리만치 투명하고 세세하게 객관화된 가족과 자신에 대한 고백. 스스로는 절대 다리를 놓지 못하는 섬들이 같은 기억을 서로 다른 파도를 맞아가며 버텨낼 뿐이다.

그나마의 희망이라면 아침부터 자정까지 이 네명의 인물이 서로 다른 감정, 맞물리지 않는 톱니를 부딪히며 부서지고 갈리면서 기다리는 내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는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르는 아들의 요양에 덜 인색하게 처신하리라는 것.

마약과 과거에 중독된 메리가 이 삶의 시작인 웨딩드레스를 찾았다는 것. 메리를 불행으로 초대한 질 나쁜 가톨릭 신자 제임스 티론이 더 커진 죄책감으로 반성할지도 모른다는 것.

유진 오닐이 만일 과거의 기억을 윤색했거나 거짓말처럼 드높은 도덕과 자비로 그 썩은 뿌리마저 마셨다면 자신의 딸과 의절하지도 않았겠지.

있는 그대로의 절망과 고통을 새하얀 웨딩드레스의 추억처럼 탈색하려 했다면 그게 매일 반복했던 메리의 마약과 뭐가 달랐을까. 이 희곡은 끝까지 투쟁한다. 울부짖어서 눈이 벌게지고 치부를 긁고 긁어서 너덜거려도 파헤치고 전진한다. 밤이 올때까지.

p192
에드먼드 : 인간이 되는 바람에 항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고, 진정으로 누구를 원하지도, 누가 진정으로 원하는 대상이 되지도 못하고, 어디 속하지도 못하고, 늘 조금은 죽음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 거죠!
티론 : (감동해서 아들을 응시하며) 

가족을 휘두르며 살아온 세대의 추억(?)이 마치 '80년대처럼 여기 내게도 서려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죽기를 바라는 아들의 비탄에 감동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끝내 허망하고 차가운 웃음까지 불러낸다.

차라리 땅에 나무를 심고 과일을 키웠다면.

p221
메리 : 그래, 기억나. 난 제임스 티론과 사랑에 빠졌고 얼마 동안은 꿈같이 행복했었지.

모든 시끄러운 감정이 처연하게 식어버린 무대의 장막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가 궁금해진다.

p.s. 미국에선 첫째를 연기했던 배우가 시간이 지나 아버지를 연기했다는 글을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땐 막내였던 시선이 이번엔 첫째가 된 묘한 기분이 불안감으로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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