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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Jan 20. 2016

눈길

117 마주친, 마주 본 기억


생전 나와 어긋났던 C가 황소눈을 하고 나를 보고 있었다. C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C와 나는 마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꿈에서 깼다. 

이제는 연락도 안하는, 그래서 누군가를 통해서만 사는 소식을 아는 관계가 되어버렸는데 C를 꿈에서 봤다. 그래서 불편한데 꿈 속에서 C는 의뭉스러운 웃음을 띄고 있었다.


꿈에서(나마) 보고 싶은 사람은 C가 아니라 L인데... 꿈에서 깨 안경을 들며 불평을 뱉었다. 그리고는 L과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그 때가 늘상 그래왔듯 부딪힌다. 



관계가 끝나고 2년이나 지나 도서관에서 마주쳤다. 나는 올라가고 L은 내려왔다. 시험기간도 아니라 도서관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학교 벚꽃이 다 지고 잎사귀들이 하늘을 꽉 채우고 있었다. 숨을 곳도 없었고 뒤돌아가기엔 급한 걸음이었다. 피하려니 도서관 문만 쏘아봤다. 

"태양을 보려거든 그옆의 구름을 보고 별을 보려거든 어둠을 봐야한다." 

고등학교 과학 선생님의 말이 생각났더라면 도서관 정문이 아니라 눈을 감고 내 눈꺼풀을 봤을텐데. 
내 눈은 문을 봤는데 내 머리는 L을 기억한다. 스무 걸음은 족히 됐을 거리에서 L의 얼굴에 어색하지만 반가운 미소가 있었다. 렌즈를 끼던 L은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L을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사실 나는 L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직시한건 문이었지만 L과 나는 마주보고 있었다.



아직도 후회되는 한가지
멈춰서서 뒤돌아봤다면.
그때 왜 그랬는지, 그럴수 밖에 없었노라고 말했다면 들어줄 수 있는 충분히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지나간 미련을 두고두고 묵히면 장이 익듯이 농이 더 진해진다고 한다. 바로 어제 일처럼 진해졌다. 5년 전에 찍은 사진보다 10년 전 눈 속에 찍어 논 장면이 더 그럴듯하다. 소중하게 지켜온 L의 편지를 잃어버렸을 때 화가 나 방을 헤집고 말았다. 그래도 사는게 이렇게, 또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려니 사라진 편지처럼 기억도 하나씩 잊어먹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여전하다. 



도서관으로 들어가서는 가만히 서 있었다. L은 가버렸는데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나서 대리석으로 쌓은 도서관에서 무얼 했는지, 그리고 나오는 길의 기억은 없다.






작년처럼 올해도 시간을 내어 춘천에 다녀왔다.
작년과는 다르게 일찍 출발해 소양강댐 팔각정에도 올라갔다. 저수지엔 작년보다 물이 더 많이 차 있었다. 그때처럼 하늘에 구름 하나 없었다. 

내려와서 시내 여기저기를 쏘다니다 오래된 중국요리집의 낡은 창을 봤다. 똑같은 창의 한 곳에 누군가 빈 담뱃갑을 올려두고 갔다. 

담뱃값이 한쪽에만 누워있다고 해서 두 창이 다르다고 하진 않을 일이다. 
점을 찍었어도 찍지 않았어도 L은 L의 삶을 살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았겠거니 오늘도 위안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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