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이 Feb 10. 2016

명절 일기 5:할머니

136 : 명절일기  5 

이번 설이 처음이고 시작이 될 것 같다. 

온가족이 처음으로 서울에 머물렀다. 
누나와 내가 거른적이 여러번 있지만 두분 부모님까지 명절 시골집을 결석한건 처음이다.

할머니의 요양원 입원을 앞두고 갖가지 설왕설래와 피치못할 오해(?)도 있었거니와 삼촌들과 고모들의 찬반에 부모님이 한 발 뒤에 있기로 했기 때문이다.




<엄마>
외할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홀로되신 외할머니는 치매진단을 받으시고 요양원 입원을 한사코 거부하시다가 영양실조 증상과 더불어 치매가 심해져 결국 부산 큰외숙 댁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요양원에 들어가셨다. 처음에 모시고 산다는 큰외숙의 제안도 거절하시고 혼자 시골에 계셨는데 홀로 지내다 보니 끼니챙기기를 습관처럼 빼먹으시더니 한번 길을 잃으신 이후 바로 입원하셨다. 그리고 외숙은 매일 요양원에 들렀고 형제들도 요양원에 꽤 자주 찾아갔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때가 조금 늦었지만 요양원을 선택하길 잘했다고들 얘기한다. 손주 챙기는 것도 힘든 나이든 자녀들이 80이 넘은 노인을 경험없이 수시로 모시는건 겉치레로나 좋을 뿐, 환자나 나머지 사람들에게나 좋을 일이 없다는게 합치된 의견이었다. 게다가 요양원에 모시고 더 자주 찾아갔다. 나도 두어번 부산에 내려갔는데 친척집보다는 한결 가벼운 마음이었다. 

시어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은 엄마는 삼촌이나 고모들이 모시겠다는 즉답이 없다면 더 늦기 전에 요양원에 모셔야 한다고 얘기했다. 





<아빠>
아빠의 엄마는 5.18 광주 민주화 사태 때 과부가 되었다. 광주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문이 돌자 광주서 사는 자식들이 궁금해 나주에서 광주로 자전거를 타고 가다 군인들이 쏜 총에 돌아가셨는데, 뒷좌석엔 작은고모를 태우고 계셨다. 

논, 산을 포함한 집안 재산 관리를 아빠의 할아머지가 아빠의 엄마께 바로 물려주신 덕에 집안이 휘청일 일은 없었지만 정서적인 기반은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40중반에 홀로된 아빠의 엄마는 오랫동안 담배도 많이 태우신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노모의 치매소식을 슬퍼하며 직잡 모시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장모의 일을 곁에서 이미 들었던고로 요양원으로 모시는 것에 찬성했다. 문제는 엄마가 작은엄마들을 잘 다독여서 '요양원 알아보기'에 노력을 안한다고 타박했다는 것이다. 

노모가 치매를 앓는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가 요양원을 알아보는 동안 아빠는 한번도 아빠의 엄마를 직접 찾아간 적이 없다. 서울서 걱정하고 스트레스는 엄마에게 풀었다. 난 할머니를 그렇게 사랑하는 손자는 아니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자식이 6명인데 며느리가 뭔가 이런 일을 맡는 다는게 애초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친가 어른들의 일을 대하는 방식에 한없이 몰상식을 느낀다.

그러다 구정 바로 전 한파가 오자 엄마의 등살에 떠밀리듯 아빠의 엄마를 찾아갔다. 겨울 한파가 당장의 문제니 요양원에 잠시라도 모실 작정을 하고 떠난 길이었는데 구정 후로 시일을 미루고 아빠는 돌아왔다.





<삼촌, 고모>
1월 초만해도 화장실이 밖에 있는 시골집에서 허리가 꼬부랑인 할머니는 혼자 지내기 어렵다는 걸 자각하시고는 요양원에 들어가시기로 결정했다. 늦게 알게 된 이야기로는 며칠 후 고모들과 통화 후 아니 그러기로 마음을 바꾸셨다. 

삼촌과 고모들은 할머니를 모실 생각을 누구도 하지 않는다. 고모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광주에 사는 두 삼촌은 삼사일에 한번 들러서 확인하겠다는 말 뿐이다. 화장실도 가기 힘들어 끼니를 거르는 노인에겐 종일 보살핌이 필요한데 이해되지 않는 의견이었다. 모시기는 부담되고 요양원에 모시기에는 불효로 보이는게 싫은 듯 한가보다. 


막내 삼촌과 아버지가 잘 얘기를 마쳐 요양원에 들어가시기로 다시 결정을 하게 됐다.
(다행히) 삼촌들이 몇 요양원을 더 찾아내서 엄마가 일찍 얘기했던 곳과 비교해서 모시기로 했다고 한다.






<나>

할머니를 좋아하냐고 내게 묻는다면 그냥 그렇다는 떨떠름한 답이 나온다. 엄마는 명절에는 늘 온갖 잡일에 시달렸다. 할머니는 우리가 도착할 때나 좋아했지 손님들이 오면 손자손녀가 앉을 자리도 뺏어 주는 바람에 누나와 마당에서 있기도 했다. 당시 서울-나주는 가장 막히는 구간이니 편도 10시간은 짧은 편이었다(요즘 서울-부산 7시간 정체라는 뉴스는 사실 조금 우습다). 왕복 20시간을 왔다갔다 하는데 엄마는 고생하고 나는 마당에 서 있으니 낮잠 자는 아빠 빼고는 명절이 괴롭지. 
  

나 아래로는 친척동생들의 터울이 긴지라 '강아지'라며 할머니는 손자가 싫어하는데도 막 만지시기도(?) 했다. 어린 애가 말을 못했다 뿐이지 부끄러운 것보다는 '수치심'을 느꼈을 게 뻔하지 않은가. 당시엔 당연하던 것들이 지금은 학대에 가까운 어떤 것들이 있다. 
옛날 이야기를 해주거나 명절 엄마&아빠의 잔소리를 상쇄시켜주신 기억도 없으니 우리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다. 아빠의 할머니에 대한 짠한 마음은 그냥... 아빠의 엄마니 그런 기분이겠거니 한다. 


할머니에 대한 나의 무심함이 이상할지는 모르겠지만, 대가족 시대도 아닌데 일년에 한두번보는 친척간의 정을 너무 따뜻하게 느끼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닐까.







<그때 그 드라마>
명절에 병든 부모를 요양원에 모시는 일로 갈등이 터지는 드라마를 봤던 기억이 난다. 10년도 더 지났을텐데 지금 할머니의 일이 딱 그때 그 드라마와 비슷하다. 

자식이니까 모셔야 하는데 그건 힘들고 요양원에 모시는건 마치 고려장 같고...
결국 '우리 집안에선 그렇게는 안된다'는 막다른 생각. 

며느리는 발언권에 제약을 두면서 책임은 같아야 하는 구시대적 병폐.

모실 생각도 없으면서 엄마에게 왜 요양원 얘기를 자꾸 하는지 의뭉스럽게 묻는 작은엄마B.

할머니는 재산을 똑같이 분할하고, 제사를 가져갈 자식을 위해 몇 가지만 갖고 계신다.

이렇게 쓰면 막장가족, 명절만 되면 치고받는 가족같은데 사실 막역한 사이가 아닐 뿐이지 명절엔 웃으면서 만나 웃으면서 헤어지는 편이다. 이번 일이 워낙 예민해서 럭비공마냥 이리 튀고 저리 튄 것이지...





할머니는 그래도 요양원에 들어가기 힘드실 거다.
장례식장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암 환자는 완치돼도 결국 암으로 죽더라."

요양원에 들어가면 결국 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한다.
요양원 입원을 앞둔 할머니의 착잡함은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135 코코몽의 정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