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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Feb 24. 2016

날 위해서였나

154 나를 위로하다가





지금보다 부지런했던 때도, 지금보다 게을렀던 때도 제자리.

시험에 합격하면 - 제대하면 - 졸업하면 - 직장을 관두면 - 아이를 낳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막상 문지방을 넘으면 발가벗겨진 기분이 된다.

언제든 반짝하고 황홀한 순간은 말 그대로 '순간'이었다.
사진 한장으로 남은 순간들처럼 말이다.


날 위해 부지런한 것도, 날 위해 게으른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게 된다. 누군가의 기준을 넘기 위해서,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배불리기 위해서, 혹은 사회가 확정한 짐을 부담하기 위해서 보낸 부지런함과 그 피로를 해소하기 위한 게으름. 



<피로사회>에서는
'일하기 위한 휴식'이라고 했다. 이 '피로사회'에서는 휴식도 생산성을 더 높이기 위한 자본주의의 노예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내가 부린 게으름도 그나마 덜 피곤한 상태에서 더 부지런한 사람이 되려고 갈망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독일 사회에 던진 이 책 한권이 사실은 한국사회라는 '진짜 잔혹극'에 더 어울렸다.

개인주의도 이기주의로 바라보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사고방식은 '전체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어디서든 무엇이든 집단적 사고방식을 만족시키기 위해 한낱 부품으로 전락해버린다.
부품이 졸업해봤자, 합격해봤자, 전역해봤자, 퇴직해봤자 '성장'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체로 낡고 닳고는 대체된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넘었던 그 마지막 순간의 황홀함 뒤에 오는 허망함.

생일 다음날이 더 초라하고, 12월 26일이 허전하고, 월요일이 비극이 된다.



젊은 날을 매주 똑같은 비극과 일을 반복하고는 
기다리던 은퇴 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삼식이가 된 많은 앞선 기성세대를 보면서 땀 한 방울이라도 '날 위해서' 흘려야 한다는 절박함을 얻는다. 





마지막으로, 
오늘 집에 오는 길 이어폰에서 흘러나온 노래 '내일'
<미생>은 사실 20년 전, 30년 전에도 있었던 일들이 
이제서야 확실한 공식이 된 이유로 만들어졌을 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5CxlB34EzSM





나아진것 없는 소시민의 삶, 
탈출 이후의 삶이 '지옥'으로 비하되고 
거기에 속하지 않았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는 세상이 사실 진짜 지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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