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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Mar 24. 2016

자기결정권의 상실

185 카프카의 변신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모음을 읽었다.

변신, 시골의사를 포함해 판결, 학술원에의 보고 등 33편의 작품이 담겨있는데 대표작인 <변신>은 70페이지에 이르지만 <작은 우화>는 열줄이 채 안되는 글이다. 카프카의 습작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다 이해할리도 만무하고 짧은 단편중에는 괴로운 지점도 있었지만, 카프카에의 첫경험은 모호하진 않았다.


자기결정권의 상실

<변신>에서 벌레로 변하는 그레고리 잠자는 물론 <판결>이나 <시골의사>, <학술원에의 보고>, <굴>에서도 자기결정권을 상실한 이들이 등장한다.

 그레고리의 벌레로의 변신은 물론, 벌레가 되기 전 근무하던 매장의 일도 자기 결정과는 거리가 멀다. 아버지의 빚과 가족부양을 위해 매장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그레고리는 곧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에 동생을 음악학교에 보낼 것 - 아버지가 반대하지만 그레고리 스스로 결정한 - 을 선언하려 했으나 벌레가 되고 만다. 그의 결근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온 지배인 앞에서 변명하지만 벌레의 소리를 사람이 들을 수 없음은 당연하다. 

자본주의의 일원인 그레고리가 없어진다고 해도 매장은 대체인력을 구하면 그만이다. 몇달간은 그를 끌어안던 가족들도 말라 죽어버린 벌레가 된 그레고리를 아무렇지 않게 느껴버리고는 새로운 집을 찾아 떠난다. 그레고리의 흔적, 그레고리의 노동이 떠받쳤던 그 곳을 말이다. 

 무력해진 자본주의의 노동자는 의미를 상실한다. 그것이 본래 본인 스스로의 결정이나 의도가 아니라도 개인의 본성이 무력해지는 것이다. 카프카는 줄곧 벌레에게 '그레고리'의 이름을 허용한다. 무력하고 거추장스럽더라도 여전히 그레고리였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목적을 상실한 그레고리는 버티지 못하고 말라버린 벌레, 그리고 하녀에 의해 '저 물건'이 되어버렸다.


p45
누이동생은 이제 그레고르가 스스로를 위해 찾아낸 새로운 오락을 즉시 알아채어 - 그가 기어다니며 여기저기 점액질의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 그레고르가 한껏 많이 기어다닐 수 있게끔 방해가 될 만한 가구들, 그러니까 우선 장롱과 책상을 치워버렸다. 그런데 누이는 그 일을 혼자서 해낼 수는 없었고, 아버지에게는 감히 도움을 청하지 못했으며, 하녀가 돕지 않을 것은 아주 분명했다.

p47
「그런데 그렇지 않겠니, 마치 우리가 가구를 치워버림으로써 그 애가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아주 저버리고 그를 함부로 내팽개쳐 두겠다고 시위라도 하는 것 같지 않겠니? 그레고르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면 모든 것이 변함없다고 느끼도록, 그래서 그만큼 더 쉽게 그 동안의 시간을 잊어버릴 수 있도록, 방을 전과 똑같은 상태로 보존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구나

p77
「그러니까 말씀입니다. 옆방의 저 물건을 어떻게 치워버려야 할는지,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놓으시라 이겁니다. 벌써 다 해결했으니까요




아버지에 의해 익사형에 처하고 마는 <판결>의 게오르크는 물론, <시골의사>의 공의(공공의사)와 <학술원에의 보고>에 마치 사람처럼 떠드는 원숭이에게서도 자기결정권을 상실한 존재들을 볼 수 있었다. 

존재하는 자신, 본질로 지탱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조종자들과 타인의 시선에 의해 어떤 목적을 위한 필요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아래 적는 생각이 과장된 발상일수도 있다.

마흔 한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을 모조리 불태워버리라고 했지만 그의 친구는 그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행히 카프카의 유산이 세상에 많은 영감을 불어넣었지만 카프카는 자기 작품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상실했다.  

자신의 작품에서 자기결정권을 상실한 인물들을 그려낸 그가 말이다.






p115
너무도 자주 수업은 다만 그렇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스승을 기리자면, 그는 저에게 화를 내지 않았어요, 이따금 타고 있는 파이프를 제 살가죽에 갖다 대고는 했었어요, 마침내는 제 손이 쉽사리 닿지 않는 어딘가가 타들어가기 시작하지요, 그러나 그러면 몸소 다시 그의 크고 다정한 손으로 불을 꺼주는 겁니다. 그는 저에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학교도 회사도 사회도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 
다만 야자를 시키고 야근을 시켜 잠과 생각을 태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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