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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Mar 26. 2016

`16 독서정리 31~40, 『깊은 강』

186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지난 [21~30]에서는 비문학 서적이 세권(?)이나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번 열권은 모조리 문학, 심지어 모조리 소설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소설이 재미있어서도 아니었는데 이리 되었다. 

이번 열권 중에선 단연 <깊은 강>이 감명깊었다. 아... '감명'이라는 말을 써본지가 얼마만인지. 무척이나 상투적이지만 무척이나 의미있는 표현이다.


책을 읽기전 찾아보는 다른 이들의 감상평을 들여다보니,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갈무리하고 비종교인들은 신앙이 없음을 갈무리하는 글이 많았다. 엔도 슈사쿠라는 작가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다 우리나라에선 그의 소설 대부분, 특히 대표작들이 종교관련 출판사에서 출판된지라 '종교, 신앙 소설'로 낙인 찍힌 듯한 인상을 받았다. 

마치 바흐는 독실했으니 그의 음악은 무조건 종교음악이다. 그래서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부적절하다는 그런 분위기. 바흐는 종교음악가이니 그의 음악은 무조건 종교에 국한되어 설명해야 한다는 또 다른 부위기.

<파우스트>나 <신곡>,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빅토르 위고의 소설들이 기독교 신앙 위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해본다면, 슈사쿠의 소설에만 눈을 흘기는 건 동양인의 기독교는 태생이 어울리지 않다고 우리 근저에서부터 올라오는 위화감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태생적'으로 느끼고 있으니까... 슈사쿠에 대한 어떤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지만 그 시선을 내가 어느정도 이해한다는 것도 역시나 불편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종교를 논하지 않더라도 <깊은 강>에서 번져오는 깊이는 감당할수 없는 울림을 준다. 갠지스 강의 깊은 포용이 어찌 갠지스 강 혼자 이루어낸 것이겠는가. 인간의 갈등과 전쟁, 비극, 고통, 참혹한 현실을 감내한 건 결국 갠지스를 바라보는 인간이었고 갠지스에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흐르듯이 인간에게도 각자의 깊은 강이 흐르고 있다는 걸... 엔도 슈사쿠가 말하는 깊은 강이 그런게 아니었을까... 





이야... 그나저나 읽은 책을 모아 사진이라도 찍으려고 했더니... 직접 사서 읽은 책은 세권 뿐이다. 빌려읽거나 서점에서 읽고 온 책이 일곱권이라니. 책을 읽는다고 해서 꼭 출판계와 문학계를 돕는 것은 아니로구나. ㅎㅎㅎㅎㅎ ^^;;






31 <기억나지 않음, 형사> 찬호께이 

▷ 발전하는 추리 소설 작가의 첫걸음. 시간과 기억이라는 그의 기법이 날로 발전하길.



32 <채식주의자> 한강 

 여전한 한국작가들의 성(性) 자극에 눈이 찌푸려지지만, 한강은 한강.



33 <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깊은 강>을 읽으니 무엇이 깊이인지 조금은 알게된다.



34 <바다와 독약> 엔도 슈사쿠

▷ 모두가 죄인이지만 모두가 양심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가 살인절차의 일부.



35 <손바닥 소설> 가와바타 야스나리 

▷ 나같은 대중을 위한 단편은 아니다.



36 <피에로들의 집> 윤대녕 

▷ 현대판 한국판 어정쩡한 키다리 아저씨



37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 오~ 시몽. All you need is 시몽.



38 <깊은 강> 엔도 슈사쿠

▷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39 <변신·시골의사> 프란츠 카프카

▷ 오늘도 변함없는 자기결정권의 상실



40 <반쪼가리 자작> 이탈로 칼비노 

 동화, 우화, 부조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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