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부활 없는 죽음을 믿는 그대들이여
오늘날 한국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문제는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죽음 없는 부활
구약과 신약의 이론적, 영적, 구원적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정점에는 죽음과 부활이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은 그가 받은 '고난'의 정점이다.
사흘만의 부활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십자가 위에서 그는 아버지가,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외쳤다.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난과 죽음이 필수적인 것이었다.
멜 깁슨이 감독했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보면 그 고난이 잘 그려져있다. 살과 피가 튀고 뼈를 찍어낸다. 영화 속 고통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눈물을 흘렸고 당시 극장 안에서는 '주여, 아버지, 아멘' 같은 흐느낌의 소리도 들렸다.
육체적 고통 뿐만 아니라 3년간 부대끼며 살던 제자들은 배신했고 구원의 대상이던 민중은 그를 향해 침을 뱉었고 뺨을 때렸다. 신성이 인간에게 받은 모욕은 아마도 사람의 언어로 기록하기 어려울 것이다.
신성이 스스로 결정하고 겪어낸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활과 구원에 이르는 필수적인 관문이다. 이는 구약의 순결한 양으로 드리던 속죄의 제사에서 기원하는데 그리스도가 순결한 양, 양을 가르고 피를 흘리는 것은 십자가 형으로 치환된다. 신이 자신이 정한 속죄의 원칙을 거대한 제사에서도 똑같이 지켜내고야 만 것이다.
그 거대한 원칙안에서 살고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과연 어떻게 부활을 꿈꾸고 있는가?
과연 죽음을 거칠 용기가 있을까
고난을 허락할 겸손이 있을까
굳이 일일이 사건들과 상황, 상태를 나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럴리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 앞에서 벗어야 진짜 신도라는 목사나 불륜과 성폭행을 저지르는 목사도 있고 권력, 자본주의와 들러붙어 성경에 기록된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 타성에 젖은 교회들도 소극적인 안일주의자들이다.
이것은 개신교 뿐만 아니라 천주교에도 마찬가지다. 한국 천주교는 소극적인 자세로 종교의 의무를 피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입을 닫고 살아왔다. 불교와 같이 소승-대승 불교가 나뉘어 있더라면 핑계라도 좋았을 것을. 성경은 적극적인 신자의 삶을 가르친다. 5리를 가달라면 10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마저 주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가르침이었다'라고 적어야 할 지경이다.
죽음은 고난이고 고난은 부딪힘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켜야 할 가치와 없애야 할 패악 앞에서 죽음이 두려워 고난받지 않고 고난이 두려워 부딪히지 않았다면 무엇이 가치 있으리요.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가 지향하는 것이 바로 '죽음 없는 부활'이다. 성경의 말씀에 따른 희생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정의나 가난과 고통에 대다수가 관심이 없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대형 교회들은 오히려 패악과 부정, 비리의 온상이다.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이해할 수 없는 성경과도 다른 설교는 물론이거니와 성범죄, 학위논란, 부정축재 등등등등.
그런데 거리에 나와서 동성애자들과 진보정치와 노동운동을 비난하는 선봉에 기독교도가 서 있다. 개신교계는 세금을 내면 교회가 망하고 나라가 망할 것처럼 종교인 과세 최전선에서 반대하고 있다. 관용과 사랑과 포용은 어디 있는 것인가.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는 말씀은 왜 상징으로만 간직하려 하는가. 가난한 교회, 가난한 성직자는 왜 자기들, 속한 교단 스스로 도울 생각도 않는가. 창녀에게 돌 던지는 무리에게 하신 말씀을 그들은 배우지 못했던 것인가.
약자를 위한 삶, 낮은데로 가라는 말씀은 어디에서 지키고 있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 한푼 두푼 쥐어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인가. 정치인도 눈치를 보는 종교계의 역할이 시스템을 직시하여야 함에도 그에 전혀 미치지 않는다. 오늘 날 기독교 세력을 따져볼때 굉장히 게으르고 안이하며 무책임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온 몸과 온 마음으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자들이라고 고백하고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제자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부인하고 죽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따르려는 그들에게 요구한 '죽음'이 무엇인지 몇가지만 적더라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가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제자들은 배와 가족, 좋은 직업을 버렸고 사도 바울은 목숨바친 가치를 뒤엎었다. 자신을 따르기 원하는 부자청년에게는 모든 재산을 버리라고 했으며 지상 마지막 메세지로 땅끝까지 가라고 했다. 그후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이 모두 순교했다는 것은 전승으로 알려진다.
부자 청년과 예수, 프리드리히 호프만, 캔버스에 유채, 1889년.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 소장
신약이 아닌 구약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살해할 것을 요구 받았으며 욥은 재산과 자식들을 잃었다. 수많은 선지자들은 어떠할까. 또 누구를 말해야 할까. 누구를 말하더라도 따르기 위해 받는 고난은 피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자정도 희생도 못한다.
자신들끼리 올망똘망 뭉쳐서 희희낙낙 즐기고 웃고 있지만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문제엔 귀기울이지 않는다.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 나름대로 큰 교회는 큰 교회 나름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어디에 꼴아박고 있는 것인가.
그러고는 누구의 탓을 하며 교회 건물 안에서 울고 있는가.
그것을 교회라 불러야 하나
친목회라 불러야 하나
아니면 이익집단이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할까
고난도 죽음도 없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부활을 외친다
눈물 터지게 목청 터지게 외치지만 고난도 죽음도 원치 않는다
교회와 종교의 부패와 어리석음을 '아픈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교회도 종교도 아프지 않다. 그들은 고난받지 않고 죽을 각오로 달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프다면 그들은 꾀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죽음 없는 부활'보다
'부활 없는 죽음'을 더 두려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