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악의 평범성
기독교에는 '창조원리'라는 것이 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것인데
6(일~금)일이라는 창조기간에 따른 것이다.
기독교의 전제 중 하나는 신은 완벽하다는 것이다.
고로 하나님의 창조에 관해 기록된 이상의 것이나
기록된 것과 뜻이 다른 것은 죄가 되거나 말도 안되는 것이 된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난 후
남자는 땅을 갈고, 여자는 아이를 낳는 수고를 하는 데까지 이른다.
부부는 일하는 남자와 아이 낳는 여자의 결합이라는
단순한 창조원리가 발생하는데,
동성애는 이에 관하여 동성간의 결합이 되므로
창조원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창조원리에 따른다면
남자와 여자는 에덴동산에서 애초에 쫓겨나서는 안된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질서를 어겨서는 안되는데
뱀과 하와와 아담에 의해서 그게 어그러진 셈이다.
여기서부터 실상 창조질서는 사람에 의해 변개되고
일해야 먹고 살 수 있고 몸으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새로운 질서가 탄생한다.
이는 인간의 개별의지, 자유의지(혹은 '죄')로 인한
창조질서의 가변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만든다.
물론 기독교 원리주의에선 아무 근거없이
'동성애(성소수자)'를 선천적인 성향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자유의지로 보기 때문에 논의는 쳇바퀴를 돌게 된다.
그런데 후천적이라는 그들의 주장에 따르더라도
실상 자유의지에 따른 성경해석의 수정은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다.
결혼관과 인생관은 물론이거니와
의학과 과학, 여성의 사회진출까지
변화의 과정에서 가학의 한 축을
왜 - 그렇게 - 항상
기독교가 담당해왔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나치 협력자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악의 평범성'을 통찰하게 된다.
악마일거라는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아이히만은 단지 준법정신이 투철한 나치 독일의 공무원이었고
아이히만의 일견 순수해 보이는 이 평범한 준법 시민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 공감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동정하거나 무죄라고 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살인 절차의 일부로서 책임이 있다고 분명히 못박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기독교인들, 특히 개신교인들은
구약 성경에 분명히 적혀있을지라도 사람이나 동물을 돌로 쳐죽이거나
한 민족, 부족을 몰살시키는 처형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20세기 초중반
노예제와 미국의 인종차별, 여성 투표권 반대 전선에는
당시 교회와 성경의 논리가 버티고 있었다.
그럼에도 성경에 기록된 특정 내용을 등에 짊어 지고
'심판자'인냥 지속적으로 성소수자들을 사냥하는 이유는 뭘까?
그들은 여전히 성경이라는 법에 제한적인 해석과
시대착오적인 오류를 갖고 투철한 준법정신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해온 해석의 틀을 용납하기 싫은 것이다.
그들의 선배, 특히 중세의 교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동성애를 사냥하듯 노리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오늘날의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범죄에 해당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호모포비아적 성향은
유교와 기독교의 보수성이 비호할 것이기 때문에
아이히만이 생각하지 않고 체계에 순응했던 그 모습을 따라
'악의 평범성'으로 비화 될 수밖에 없다.
이 비유가 물론 아무개들에게는 매우 메롱한 것이 되겠지만,
그들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투철한 준법정신은
누군가의 인격과 권리를 훼손 할 우려가 매우 크다.
물론 그들은 성경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동성애와 성소수자들은 크나큰 죄인이기 때문에
인격과 권리 따위는 고려사항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바와 같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