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 기돈교가 되었다.
기독교의 전제는 성경이며
이 성경의 기록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진리에의 조건이다.
마태복음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지만 기독교가 과연 그러한지를 따져보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구약시대의 이야기는 신약시대에 적용되지 못하고
신약시대의 이야기는 A.D 시대가 시작한 뒤
교회의 시대였던 중세는 물론이거니와 근대를 지나 현재에도
그다지 진지하게 지켜지고 있지는 않다.
교회권력이 지배하던 중세시대에 신약의 구원과 용서의 정신은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을 통해 이뤄지지 못했고 이어진 제국주의 시대에선 평등에 기초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교회와 왕정이 주도했던 식민지의 원주민들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당시 교회(가톨릭)은 원주민들에게 철저한 인종차별을 시도했고 이런 신권 대행자들의 차별은 정치적 지배의 원리로 이용됐다.
20세기 미국에서는 흑인의 차별을 종교인들, 특정 종교지도자들이 주도하기도 했는데 이는 모두 성경의 기록과는 무관한 주장이었다.
교회와 종교인들은 기록의 절대성과 그 명령과 지침에도 불구하고 시대에 따른 상대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말씀은 영원한데 말이다.
발전하는 시대-사회와 이에 대한 종교계의 입장을 백분 적용할 때 이는
기독교의 '시대적응성'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시대에 따라, 사회 변화에 따라 자신들의 입장을 변화시켜온 것이다.
물론 이런 시대의 진보적인 변화에 기독교가 늘 걸음을 함께 한 것은 아니었다. 성경의 가치나 기록을 위배하거나 '건드리는' 사안에 대해서 반대입장을 펴왔고 변화의 막차에 탑승한 모양새였다. 번잡하고 난잡하게 분립된 한국의 개신교는 차치하고서라도 교황청의 낙태, 이혼, 동성애 등에 대한 입장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신학전공도 성경학자도 아니니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성경의 절반 정도는 이미 교회가
사회(그들이 '세상'이라고 부르는 비기독교적 사상의 세계)의 질서를 따름으로해서 비적용되는 문구들이 되버리지 않았을까?
재미있는건 사회가 변화의 지점에 닿을 때마다
기독교는 그 변화의 지점을 강력하게 '말세'라고 표현해왔다.
세상이 마지막 때, 사람으로 치면 암 말기니 별 오만가지 꼴을 다 보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 말세가 2000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데 2000년 전의 초대교회 사람들이
현재의 세상, 아니 기독교를 본다면 아마 뭐라고 말할까?
변하지 않는 말씀 위에서
그 차이는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들에게 굉장한 절망을 느끼게 할 것이다.
기독교의 시대적응은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과 이를 가장 먼저 선점한 권력에 귀의한다.
기독교의 훌륭했던 지도자들에게서 그러지 아니했던 경우를 간혹 발견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시대, 절대적으로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은 자연스레 그들이 선하지 않다 여기는 세상의 권력에 굴복해왔다.
가톨릭이 건설업에 치중하며 면죄부를 팔 때
그 내부에서 전염병처럼 도진 권력 순종적 태도는 교황이 권력을 쫓아 움직였던 제국주의를 지나 현대 기독교 세계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노예라는 경제적 자산이 중요해지던 시기에는 식민지 원주민을 신의 간섭이 없는 2등 인류로 치부한 것은 물론이요, 현대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이나 이념과 종교가 다른 이들을 불가촉 천민쯤으로 여기는 기독교인들을 전세계 각처에서 꽤나 많이 찾을 수 있는데, 한국은 물론이거니와 미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념과 권력, 이권에 복종해온 이러한 특성은 세상의 권위 또한 하나님이 주셨다는 말씀의 전제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인정할것은 해야겠지만 불의한 권력에 복종해온 역사가 그 반대보다 짙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식민시대를 이어 온 노예제와 인종차별, 나치독일에 무릎꿇은 독일 기독교, 신사참배를 인정한 초기 한국 개신교. 대다수를 차지한 기독교의 주류들은 대부분 그렇게 큰 흐름의 권력에 복종해왔다.
믿음이 생명보다 귀하지만 굴복할땐 굴복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는 오늘날까지 굴종의 은쟁반을 들고 다니면서도 자신들의 뿌리와 정통성은 나치에 맞선 본 회퍼 목사나 주기철, 손양원 목사에게서 찾는다.
어떻게 금같은 뿌리에서 썩은 열매만 나오는지는 성경적으로도 해석이 불가능하다.
특히 현재 대한민국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천박한 것과 학벌주의에 결탁한 대형교회와 반공에 매몰된 보수 원로 목회자들이 득세한다. 이는 돈과 극보수라는 특이 권력을 쥔것같은 모양새지만 실상은 성경의 권위가 그 껍데기가 금장이냐 가죽이냐 고무판이냐에 따라 순위 매겨진 것과 다름없다.
결국 포장지에 권위를 허락한
굴종의 정신으로 거짓 명예를 유지하는 얕고도 얕은 술수에 불과하다.
기독교는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성경의 교리에 위배되는 것들을 하나씩 인정할 것이다. 이혼이나 금권지배나 서열주의, 천민자본주의, 학벌에 무릎꿇고 권력지향적인 그동안의 태도와 역사를 통해 볼 때 자기들끼리는 마지노선이라 여기는 성소수자들에게도 문을 열 것이다.
기독교, 특히 대형교회로 상징되는 한국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 제사장들과 다를 바가 없다.
사학법 반대하던 그 열정으로 간통법 위헌을 저지하지는 않더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그 치들 하는 짓거리가 그런 천박함을 고백하고있다.
권력과 자본에 잠식당해 그것으로 순위 매겨지는 현재 상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는다.
교리, 성경 텍스트의 절대성도 순수성도 잃고
기껏 한다는 소리는 시대에 맞게 어떤건 취하고 어떤건 취하지 않는게 오늘날의 현실에 맞는 것이라는선택주의다.
참 믿기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