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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Dec 06. 2016

기독교의 기브 앤 테이크와
쇠퇴

노예 이데올로기와 지배 이데올로기의 동거



보험계리학에서 x라는 지점이 있다. 
x는 보험계약에 따른 사건이 발생하는 지점으로 보험사는 이 x를 근거로 보상금을 지급하게 된다. 생명보험에서는 사망시점, 연금보험에서는 계약시점, 상해나 화재보험에서는 말 그대로 사건이다.


보험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에도 지점 x가 있다. 
바로 사망시점. 
현세와 내세,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 결정되는 그 지점.







기독교는 '기복신앙'을 철저히 기피해야 할 병폐라고 말하지만 실제 기독교 교리를 따지면 개인이 사망하는 시점 x를 기준으로 '천국과 지옥' 내지는 '상급'이라는 보상을 지급한다.



현세에 어떻게 했느냐(give)에 따라
내세에 얼마를 취하느냐(take)가 결정되는 원리인데, 이는 기독교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기복신앙과 굉장히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성경의 규율과 기준에 따라 '헌신'하는 만큼 그들의 '상급'이 시점 x에 지급되는 것이다.

보다 현실적으로 비유한다면 보험료를 얼마나 냈느냐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것이다. 그것도 일시급으로. 그리고 그 결정은 본인의 기준이 아닌 신의 저울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기독교 보상체계는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했던 
계급사회의 하층민들을 유인하는 좋은 논리였다. 


오늘날에도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는 기업과 상류층의 착취는 계급사회가 일반적이던 중세, 산업사회에서 가혹의 정점을 찔렀고, 현세에서 받을 수 없는 정당한 대가를 유보해서 내세에서는 몇 곱절로 받을 수 있다는 희망과 환상을 보여줬다. 


기독교 부흥이 이뤄졌던 대부분의 시대배경이 계급사회와 산업화가 극적으로 이뤄졌던 불평등의 시대, 피착취자가 불공정을 느끼떤 시대였음이 이를 반증한다. 우리나라만 해도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지나 70~80년대까지의 산업화 시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서민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 시대가 기독교 부흥기가 겹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보상을 유보하는 기독교 구원교리는 피착취자가 현실의 부조리와 불공정을 견디게 하는데 인내심을 가져다 줬을 뿐 아니라 착취자에게도 도움을 줬다.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그들의 지배와 착취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주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게다가 기독교 교리는 지배자의 권위는 신이 허용한 것임을 말하고 있으니, 기독교는 일종의 불공정 착취 지배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한다. 이는 오늘날 극우를 자인하는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지난 독재자들을 미화하는데도 이용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말이다. 그들의 권세는 '어떤 이유'에서 하나님이 허용했다는 논리로 말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Give & Take 식의 보상논리는 
작금의 기독교 인구 감소에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세상의 타락과 무신론의 창궐에 따라 기독교 인구가 감소하고 교회가 핍박받는 다는 논리와 변명은 오히려 기독교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오늘의 기독교의 교리와 신앙이 21세기의 자본주의와 정보화사회의 흐름에 휩쓸리고 있다는 것만을 말하는 정화기능의 부재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약화, 신앙의 불황 사태는 
내세에서 기대할 만한 보상을 기대하지 않아도 되는 
과거보다 적절하고 공정한 노동자 계급에 대한 보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는 과거와 달리 
내세의 고기, 버터바른 빵, 겨울의 난로를 기대하지 않아도
따뜻한 잠자리와 풍족한 식사가 제공되고 때론 여분의 즐거움까지 즐길 수 있다.



살인적인 착취가 사라지고 
비교적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평등한 인권 개념이 사회에 정립되면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심판과 보상을 내세에 기대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풍요와 풍족을 경계해야 한다는 기독교 교리의 어떤 목적이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대형교회와 신앙생활 열심히 해서 성공했다는 기업과 기업인, 정치인들 사회인들과 그들의 발언과 사업을 보면 별로 신빙성을 느끼기 어렵지만. 









여기엔 역설이 있다.

풍족하고 풍요롭고 정의로운 사회가 될수록
억울한 자, 슬픈 자, 비통한 자, 약한 자들이 
내세에 보상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역설이다.



오늘날의 사회, 세상이 정의롭고 풍족해질수록 
다음 생의 보답과 보상은 힘을 잃는다.



이 세상이 종교의 정의를 이뤄갈수록
종교의 기능과 전도의 목소리가 힘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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