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리비다케 지휘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클래식 음악가로 지휘자 세르쥬 첼리비다케를 좋아한다.
유럽에서 1류라기에는 약간 외곽선을 타던 뮌헨 필(MPO)를 누구나 지휘하고 싶어하는 탑 클래스의 오케스트라로 끌어올린것은 물론이거니와 브루크너 교향곡의 수준을 하늘 위로 끌어올렸다.
이보다 더 유명한 것은 첼리비다케의 극단적인 음악적 결벽증, 느린 템포와 연주 중 터지는 신음과도 같은 기합. 그리고 무엇보다 현장의 음악의 감동을 추구하느라 음반 출반을 극도로 싫어했다는 점이다. 물론 오케스트라 운영과 주변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생전 암묵적인 출반이 이루어졌고, 사후 음반을 절대 금하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 음악계에서 '음악적 유산'이라는 명목하에 EMI에서 뮌헨필 시절의 총반을 내놨다.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현장의 음악을 쫓아다니기엔 시간과 주머니사정이 여의치 않은 나놈같은 사람에게 EMI의 첼리비다케 시리즈는 마치 축복과도 같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의 경우 므라빈스키와 카라얀, 게르기예프의 음반이 명반으로 알려졌다. 나 또한 그들의 음반을 들었는데, 한달전쯤 음반 입수(?) 기념으로 첼리비다케의 연주를 듣는데 '비창'에서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많은 사람들이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 그 경험을 일찍이 이해하지 못했는데 첼리비다케의 연주에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 음악으로부터 받는 위로라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에 발표했던 교향곡이자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에, 혹은 동성애와 자살이라는 의혹에 대한 연민이 전혀 아닌 단지 귀를 통해 들려오는 음악이 가슴 속 응어리를 풀어주는 그런 감화.
첼리비다케의 음반은 대개 길다. 다른 지휘자의 음반에 비해 1.2배 정도랄까. 그래서 그의 팬임에도 불구하고 브루크너나 브람스 외에는 첼리비다케의 연주를 참기가(?) 어렵다. 음악의 쉼표, 공백마저 압도하는 순간과 찰나에까지 이르는 첼리비다케의 압력이 사실 모든 작곡가의 음악에 적용되지는 않는데다가 나는 취미 수준의 청취자니까 아무래도 종종 답답하다.
이번에 그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 5번을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이후에 이어진 6번은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4, 5번은 야생마같이 질주하는 므라빈스키나 금관의 황금빛이 도는 듯한 우아한 게르기예프의 음반이 좋았다면, 6번은 한 순간도 자신이 아닐 수 없었던 차이코프스키의 음악과 인생이 첼리비다케의 절대 끊어지지 않는 긴 호흡과 상생하고 있었다.
매일 시끄럽게 떠들면서 사는 나놈이 지줄대는 창고로 사용하는 블로그에서조차 떠들수 없는 뭉쳐진 감정과 이야기가 녹아나는 나른함...
그런 기분이 들었다.
빌헬름 켐프의 슈베르트를 들었을 때
칼 뵘의 모차르트 레퀴엠을 들었을 때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를 들었을 때
브루크너의 브루크너 교향곡이 아니라 첼리비다케의 브루크너 교향곡이라는 말이 있다. 첼리비다케의 브루크너는 재해석이 아니라 재창조라고 해야할 정도로 다른 세계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에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놈만의 거침없는 생각의 세계에만 해당되는 것이겠지만...
차이코프스키가 이 교향곡의 초연 이후 며칠 후에 죽었기 때문에 작곡가 자신의 진혼곡이라는 말도 있다. 어떤 평론가는 인생의 희노애락을 노래하고 격정을 뚫고 조용히 잠드는 그런 곡이라고도 말했는데, 첼리비다케의 연주를 듣고 나니 이제사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진다.
나의 무지도, 아무개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