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 환상과 이성의 세계
{덧. 글은 긴데 요약되는 결론은 마지막에 짧게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우상과 이상이 있다.
박정희와 노무현
박정희는 `60~`70년대 한국의 경제발전과 함께 지독한 독재와 민중 핍박을 시행했고, 노무현은 군사독재와 정치야합을 비판하며 혜성과 같이 등장하여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2000년대 민주주의와 경제를 함께 발전시켰다.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의 인생을 뒤로하고
박정희는 누군가의 반인반신의 우상이 되었고
노무현은 잊지 못할 이상의 정신이 되었다.
우상은 '환상'의 지지를 받고 '이성'의 비난을 받는 반면,
이상은 '환상'의 비난을 받고 '이성'의 지지를 받는다.
박정희는 죽어서 동상이 되었고 비난 받아선 안되는 무결해야만 하는 우상이 되었다. 반면에 노무현은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확인 불가한 상상의 비난을 받고 있다.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느니 빨갱이라느니... 이성으로는 재단하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환상'이라는데에는 양극단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두 사람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마치 거기에는 천국과 지옥뿐인 것처럼 말이다.
2015년 8월 머니투데이 조사 발표, 올해 하면 1년 새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이성이라는 눈을 뜨고 박정희를 보면 재벌 위주의 경제발전에 더해 반공 극우를 무기로 민주주의를 학살하는 독재자였다. 노무현은 대북, 대미 정책에 다소 비난받고 있는데 비해, 민주주의와 언론자유, 의료복지, 경제성장에 뛰어난 행정적 역량을 발휘했다.
각 분야를 낱개로 분류해서 업적을 비교한다면 20여년간 독재의 정점에서 정치를 했던 박정희와 5년간 여론과 야당의 저급한 손가락질을 견디며 재임했던 노무현을 비교한다면 정성적이건 정량적이건 박정희와 노무현의 점수를 비교한다면 누가 우세할까.
박정희 1/4의 재임기간을 고려해야 하고, 어느 나라에서나 발견되는 산업화 초기 단계의 급격한 발전곡선, 그리고 이념대립에 따른 노선 전쟁이 가져다 준 서방의 각종 지원.
우상화된 박정희의 경제발전은 80년대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도 줄기차게 이어졌다. 보호무역과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지지, 전세계적인 경제성장을 생각하면 군부정권의 경제역량은 평범한 정도다.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열악하고 열악한 상황에서도 성실하게 일한 국민을 마른 걸레 짜듯이 쥐어 짠 독재를 생각한다면 평균 점수도 과한 점수다.
`60~`80년대 국민 대다수의 근로상황은 오늘날 천대받는다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상황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었다. 하루 12시간 이상 근무는 기본, 보름에 하루를 쉬던 그당시 수많은 노동자들을 괴롭히던 정부와 고용주들.
그리고 산업역군이던 그들을 공돌이와 공순이로 치부하고 홀대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빨갱이로 몰아가던 언론 부역자들과 그에 동조했던 많은 무지한 시민들의 계급주의.
지금은 박수치며, 향수를 느끼며 듣는 노찾사의 <사계>는 계절의 변화를 느낄 새도 없이 '미싱'이 돌아가는 세계에 매몰된 노동자와 청춘의 비애를 울부짖는 노래였다.
환상의 후광에 비친 우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에게 이성의 대화와 논리가 통하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법으로도 예상치 못했던 범죄 의혹을 강하게 받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에 대한 특정 집단의 지지와 경배에도 이런 지배가 적용된다. 이해안됨이 정상이다. 환상의 양극단에서 반인반신과 빨갱이라는 이분법만을 허용하는 시소에 탄 사람들에게 무수한 스펙트럼은 선글라스에 비친 그늘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을 정의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신'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돌고래를 지키는 신인 프로테우스는 예언과 변신의 능력을 갖고 있었다. 디오니소스는 술과 풍요의 신인 동시에 '황홀경'의 신이었다. 알코올이 가져오는 취함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니 디오니소스의 능력으로 이해한 것이다.
지구본 위의 새끼손톱만한 나라의 18년 독재 대통령을 '반인반신'으로 묘사한 것은 이성의 과학적 해설을 포기한 채 환상의 안개에 흠뻑 취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을 통해서 충분히 해석 가능한 그 시대의 경제성장을 '박정희'라는 우상의 능력 하나에만 집중시키는 것. 환상이 만들어 낸 우상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밖에 없는 21세기의 무속신앙인 동시에 사고의 부조리다.
환상과 신앙이 동재하는 이유로 박정희라는 환상과 지지자로 보이는 추종 신자들의 관계는 절대 수평적일 수가 없다. 무결한 대상은 지고지순한 높이에 서 있는 우러러 볼 수밖에 없는 태양신이 된다.
건강한 비판마저 무례와 무엄한 짓이 되어 고대의 형벌도 가능하다는 인식이 종용될 수도 있다. 절대 복종을 요구하는 우상에 절하지 않으면 불태워졌던 성경의 다니엘 이야기는 우상에겐 예외 없음을 잘 보여주는 상징이다.
박정희 탄신제에서 시위를 하다 폭행당하는 시민
노무현이라는 이상은 이성의 지지를 받는다.
노무현은 우상이라는 환상에 둘러싸인 대통령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노무현과 함께 정권을 운영했던 국무위원이나 지지자들의 비판도 가능했다. 잘한 것은 잘한 것이고 못한 것은 못한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열렬한 동지애를 보여줬던 유시민이나 문재인 등 참여인사 정부의 발언을 들어봐도 알 수 있다.
이성의 세계에 무조건적인 충성따위는 없다.
우상이 아닌 이상이기 때문에 장단점을 재단할 수 있고, 이상의 불완전함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재임 당시 김용옥, 손석희와 대담을 할 수 있던것도 노무현은 이성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상의 지지를 받는 사람들이 당시 노무현을 힐난하던 일을 '그럴 수 있다'로 생각한 것은 이성의 세계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우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에게 비난할 수 있고 헐뜯을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은 '우상'이 아니기 때문에 저급한 태도를 가차없이 용인하는 구실이었을 뿐이다. 그들에게 허용된 천국과 지옥 중 노무현은 '지옥'을 선택받은 것이다.
이제 이 연장선상에서 기자회견도 하지 않고 질문도 아니받고, 대면보고도 받지 않아도 박근혜를 지지하고 박수쳤던 사람들의 세계를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송곳 하나 들어가지 않고 매끄러운 '우상'화 된 대상에게 흠결은 용납되지 않는다. 박정희의 후광을 그대로 이어받은 박근혜의 매끄러움의 비인간성(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을 찬양하는 추종자들.
박정희와 박근혜의 세계는 환상의 안개에 푹 덮인 천국이기 때문에 비난 받아서도 안되고 비난할 것이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비난할 수도 없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고 말았다.
비인간적인 우상으로 보았던 존재의 정체가 실제로 비인간적인 자기우상에 빠진 메두사와 같은 요물의 정신을 완비했다는 것을 말이다.
'박정희'에게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노무현'에게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두 인물의 공과를 정량화하고
각각의 세계를 선택가능한 거주지로 둔다면,
과연 누구의 세계에 사람들이 살고 싶어할까.
새누리당 사람들과 박사모도
박정희나 박근혜와 살고 싶지는 않을 걸
그들읯 천국엔 프로포폴과 시바스 리갈의 강이 흐르고
줄기세포 나무에 비아그라가 달려서 고산병을 극복하고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