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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Feb 23. 2017

<사일런스>와 <핵소 고지>

앤드류 가필드, 엔도 슈사쿠 - 침묵, 그리고 안식교

<사일런스(침묵)>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
<핵소 고지>는 멜 깁슨 감독의 영화로

주인공은 앤드류 가필드입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으로 유명해졌으나

이전에 이미 <보이 A>와 <네버 렛 미 고>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입니다
저는 가필드 횽의 팬


침묵 SILENCE 공식 예고편 (한국어 CC) - YouTube

<사일런스>는 천주교 신부를 주인공으로 한 종교영화
<핵소 고지>는 양심적 거총 거부 병사를 다룬 전쟁영화

두 영화에는 신기하게도 크게 세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01 주인공이 앤드류 가필드이라는 점과
02 두 주인공 모두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점, 그리고
<사일런스>는 천주교
<핵소 고지>는 놀랍게도 국내에선 이단 취급을 받는 제7안식교
03 일본이 등장한다는 점





역시 앤드류 가필드의 캐릭터는 초식남입니다
특별히 두개의 최근작을 보면 야리야리한 외모와 여리여리한 목소리에서 뽑아내는 호소력이랄까요... 연약한 외모에서 오히려 역설적인 굳은 신념을 표상하는 연기가 매력적인데 이런 캐릭터는 앞으로도 독보적이리라 생각합니다.


비슷할 수도 있는 배우인 에디 레드메인의 목소리는 폭이 넓어 가필드보다 여리지 않거든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사일런스>는 한국어판 원작인 바오로딸의 <침묵>과 많은 점에서 다릅니다. 번역작이 편집을 하지 않은 완역작이라고 한다면 영화는 추가된 부분이 많아요. 그래서 러닝타미은 160분. 책 한권 읽는 시간과 영화관람 시간이 또이또이입니다.


또 일본 배우들의 연기가 굉장합니다. 
통역관으로 등장하는 아사노 타다노부와 
판관 이노우에 역의 이세이 오가타는 특히 인상적입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앤드류 가필드의 연기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게 한 <헥소 고지>에서 보다는 <사일런스>에서 낫다고 했는데 저로서는 <핵소 고지>가 더 나은것 같던데 말입니다. 

<사일런스>는 등장하는 각 배우들의 위치, 역할에 따른 변주가 원작인 <침묵>에서만큼 다채로워서 앤드류 가필드의 연기가 특별히 돋보이기 어려운데 반해, <핵소 고지>는 참혹한 전쟁 중 홀연히 빛나는 영웅 역이라는 점에서 후광이 남다릅니다.

<핵소고지>에서의 가필드가 맡은 주인공 역은 홀로 솟아오른 한라산이나 후지산과 같은 풍경입니다. 특히 전쟁에 홀로 남아 '한명만 더, 한명만 더'라고 중얼거리며 생존자를 수습하는 장면은 특유의 여리여리한 목소리와 금방이라도 넘어질것 같은 외모가 역설적인 영웅미를 돋보이게 해주죠.



잘만하면 오스카에서 재결합한 엠마 스톤(라라랜드)과 앤드류 가필드의 동반 수상이 일어날지도요.





두 영화 모두 여러면에서 추천하고 싶은 멋진 영화지만, 오래 남을만한 작품은 <사일런스>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다들 알잖아요
미국식 영웅주의, 영웅만들기

<핵소 고지>는 미국에 '이런 영웅'도 있다는 호소가 약간은 묻어있는 느낌입니다.


그에 반해 <사일런스>는 원작인 <침묵> 자체가 워낙 깊고 다변적인데다가
신앙 유무에 상관없이 생각할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를 던져 줍니다.
거기에 더해 원작에 워낙 충실하고자 해서 영화 전체적으로 사운드마저 <침묵>스럽습니다.



<핵소 고지>가 종교적으로 행동하는 종교인에 대한 시사점을 던져주지만 한국 기독교, 특히 온돌방 뜨신 자리만 찾는 한국 개신교의 수준으로는 제7안식교 신자의 신념과 행동을 받아들이기 어려울테니 이슈로는 어렵겠어요. 한국 개신교적 교리로는 그래봤자 지옥가는게 그들의 불편한 진실이니까요.

<사일런스>는 신앙과 전도에 대한 근원적 질문입니다. 당시 일본의 관리들이 꾸미는 배교전략은 극도로 잔학하면서도 교활한 연좌제를 활용하거든요. 







그리고 책으로는 긴가민가 했던 작가 엔도 슈사쿠의 분신으로서의 키치지로에 대한 의문점도 많이 풀렸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인 <사해 부근에서>와 <깊은 강>, <바다와 독약>까지 통틀어 살펴본다면 슈사쿠는 자신의 분신으로서 키치지로를 지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키치지로는 상황에 따라 쉴새없이 회개와 배교를 오가는 현대 기독교인을 표상합니다. 사실 근대화되기 이전의 일본 평민 사회에서 배신을 쉴새없이 하는 키치지로는 벌써 몰매맞아 죽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끝까지 살아남아서 '어떤 표상'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슈사쿠는 피할 수 없는 신자의 딜레마로 해석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어쨌든 끝까지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원죄를 가진 피조물이자 슈사쿠의 자화상입니다.  

<침묵>이후의 작품인 <사해 부근에서>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과 친구로 이분화시켰는데, 잔인할 정도로 단순화되고 객관화된 키치지로가 오히려 엔터테인먼트인 상품인 영화에서 '보다' 명확한 입지로 이해됐던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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