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사실을 빨리 깨닫는 사람과 늦게 깨닫는 사람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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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셨다. 다정한 성격도 아니고(오히려 무뚝뚝한 편이었다) 표현을 하시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에는 분명히 대가가 따랐다.
아버지는 4남 2녀의 넷째이자 삼남이다. 장남도 차남도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나 장남(나의 큰아버지)은 자손이 귀한 큰할아버지의 양자로 보내졌고, 차남(나의 둘째 큰아버지)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왕래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삼남인 아버지가 첫째 노릇을 하고 사셨다.
매년 추석이 다가올 즈음이면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의 낫 가는 소리가 들리면 곧 벌초 동원령이 내려진다는 의미였다. 나는 쓸만한 노동력이 못되었지만, 그렇다고 제외시켜주지는 않았다.
조상님들이 모셔져 있는 산까지는 버스를 타고 또 버스를 타고 한참을 걸어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낫이며 호미, 먹을 음식, 물을 가방에 넣고 낑낑대며 따라갔다. 날은 더웠고, 가시에 찔리고 낫에 베인 손은 아팠다. 설에는 성묘는 따라나서야 했지만, 벌초는 하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명절이 되면 아버지는 부지런히 친척집을 돌아다니셨다.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두 명의 고모 총 4집을 명절마다 돌아다니는데 나는 무조건 따라다녀야만 했다.
이유도 없었고 선택사항도 아니었다.
아버지 뒤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 나를 보며 누나들은 소리 없이 혀를 내밀며 ‘메롱’을 시전 했다.
명절이 되면 신문에 나오는 TV방영표를 뒤적이며 저마다 자기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결정하는데 나와 누나들의 취향은 전혀 맞지가 않았다.
그런 경우에는 결국 1층 티브이 채널은 내 차지였는데...
(2층에도 TV가 있긴 했지만 그곳은 더웠다)
내가 아버지를 따라 집을 나서면 해지기 전에 들어올 일이 없으니 결국 명절에 뻔히 집을 나서야 할 줄 알면서도 TV채널 욕심을 부린 나를 놀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성룡과 이연걸, 견자단은 시간의 흐름대로 사라져 버렸다. 지금처럼 TV 채널이 많지도 않았고, OTT도 없는 시절엔 명절에 방송국에서 틀어주는 경우가 아니면 그런 영화를 보기가 힘들었다.
“아이고 막둥이 왔어?”
친적집에 들어서면 나에 대한 인사는 잠깐이었고, 이내 어른들은 어른들의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들으며 가만히 그리고 조용히 자리를 지켜야 했다.
친척 어른들이 있는 자리에서 버릇없이 행동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꽤나 무서운 존재였다.
그리고 이 인내를 세 번 더 반복해야 했다.
고역이었다.
하지만 지금...
물론 차량용 내비게이션이나 스마트폰의 지도어플이 있으니, 주소를 입력하면 어디든 못 찾아갈 곳은 없겠지만...
아버지와 조상님들이 모셔져 있는 산과 친척어른들의 집은 우리 가족 중에서 나만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내비게이션이나 스마트폰이 없던 그 시절, 그런 물건이 생기리라 예상하지도 못했던 그 시절에 아버지는 나를 부지런히 데리고 다니면서 내 머릿속에 정보를 입력시켰다.
나중에 아버지가 세상에 없는 순간이 오면 그 일들을 이어서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