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청춘

by 달리는 느림보


내가 아버지를 알기 전의 내용이다. 아버지에게 들은 기억의 편린을 알려진 역사적 사건에 끼워보았다. 당시 아버지가 옛날이야기를 할 때에는 새겨듣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글을 쓸려고 생각하니 그때 더 잘 들어둘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불명확한 내용이 있어도 아버지는 가고 없으니 기억의 빈 공간은 나의 추측으로 채워야 할 수밖에 없다.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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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4남 2녀의 넷째이자 셋째 아들이다.


큰아버지는 손이 귀한 큰할아버지의 양자로 보내졌고, 둘째 큰아버지는 이유는 모르지만 왕래가 없어 기억이 전혀 없다.


결론적으로 셋째 아들인 아버지가 장남 노릇을 하게 됐다.


1949년

토지개혁법으로 지주들에게 땅을 매입하여 소작농들에게 분배하였다. 아버지도 이때 논을 분배받은듯하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농사를 지어 분배금을 갚았고 그 논으로 동생들을 건사했다고 했다.


1955~195x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군대를 가야 했다. 아버지는 농업대학에 합격은 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다니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바로 군대에 갔을 테니 55년쯤이리라. 전쟁후에 군대를 갔고 참전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1957년

토지분배금 변제가 57년에 종료되었다고 하니 이즈음에는 빚을 다 갚고 논을 소유하게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먹고살 방법은 마련한 것이다.


1960년 또는 61년 어느 즈음

아버지는 대통령 선거에 앞장서서 청년활동을 했다고 했다. 지지하는 후보가 대통령 당선이 되면 면장자리도 노려봄직하다고 했다.


이제 와서 찾아보니 그 유명한 315 부정선거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상대는 민주당 조병옥 후보였다. 그러나 대선 1달 전 조병옥 후보는 사망했고 민주당은 후보교체 없이 대선을 치뤘다.


결과는 이승만 대통령 당선이었지만 결국 곧 하야하고 장면정부가 들어섰다.


아버지는 상대후보 청년들과 충돌이 잦았고 선거결과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상대 청년들은 몽둥이를 들고 아버지집 앞에 와서 동네를 떠나라고 협박했다고 했다.


당시 아버지가 살던 곳 성당에는 외국인 신부님이 있었는데 하루는 아버지를 불러 쌈박질은 그만하고 자기를 따라서 시골로 가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시골에 성당을 지으러 가는데 같이 가서 일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 있어봤자 몸을 온전히 보전할지도 모르겠고, 본인 때문에 가족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신부님을 따라서 시골로 가서 1년만 일을 하고 돌아올 생각을 했다고 한다.


처음 생각은 그러했지만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 농사를 다시 지은적은 없다



1963년 11월

시골 처녀를 만나 결혼했다. 나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손이 야무졌다.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을 알뜰살뜰 모아서 자식들 대학교육까지 다 마친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계신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돌이켜 보니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이제는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헛헛하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