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96)
호랑이는 단군신화에 나올 만큼 매우 가까우면서도 두려운 짐승으로 우리 겨레와 함께한 산짐승이다. 호랑이는 마을로 내려와 집짐승뿐만 아니라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잦았기 때문에 <팥죽할멈과 호랑이>, <호랑이와 곶감>, <호랑이 뱃속 구경> 같은 옛이야기 곳곳에 나타난다.
하지만 호랑이를 가리키는 배달말은 본디 ‘범’이다. “범爲虎”(훈민정음 해례본, 1446), “虎난 버미라”(월인석보, 1459), “虎 갈웜 호”(훈몽자회, 1527)에서 보듯, 범, 갈웜이라고 했다. 호랑이는 범 호(虎), 이리 랑(狼) 자에 뒷가지 ‘-이’를 붙여 만든 말로 본다. 애초 ‘호랑’은 범의 용맹함과 이리의 슬기로움을 보이는 짐승을 가리키는 말로 썼는데, 19세기에 이르러 ‘이리’라는 뜻이 흐려지고 ‘범’만 가리키는 말로 뜻바꿈이 일어난다. 지역말에서는 호래이, 호리이, 큰짐승, 산짐승이라고 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엔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 하여 무당이 진산에 도당제를 올렸다”는 대목도 있다. 땅이름에는 범울(범우리)이나 범바위(범바우), 호명(虎鳴), 호암(虎巖)에서 보듯 ‘범’으로 살아 있다.
잘 알다시피 정선은 내남없이 알아주는 깊은 산골이다. 자연히 ‘범’과 마주치거나 범 울음 소리를 들을 일도 더 잦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조선후기는 두말할 나위 없고 20세기에 이르러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면서 농사 지을 땅을 빼앗긴 사람들은 산으로 숨어들어 부데기를 일구고 살았다. 그만큼 호랑이한테 입는 피해도 많았다. 호랑이한테 당한 유해를 모아 화장하고 그 자리에 돌무덤을 쓰고 시루를 엎은 뒤 쇠 젓가락을 꽂아두는 호식총이라는 독특한 장례 모습도 백두대간 태백산 지역에선 매우 흔했다.(※ 돌무지에 시루를 엎고 물레 실꾸리를 감을 때 쓰는 쇠 젓가락을 꽂았는데, 쇠 젓가락이 마치 창처럼 생겨서 호랑이에게 물려죽은 귀신(창귀)을 찔러 죽인다는 뜻과 함께 시루 안에서 물레 가락처럼 맴돌기만 하고 빠져 나오지 말라는 뜻이 있다.)
‘범바우골’도 그런 땅이름 가운데 하나인데 여량면과 사북읍에 전하는 범바우골 유래를 보자.
개금벌 뒤에서 서쪽으로 뻗는 골짜기다. 골짜기 안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는 곳이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옛날 호랑이가 송천 마을에 사는 할머니를 잡아 먹고 머리만 달랑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호환을 막기 위해 그 바위 위에 시루를 엎고 시루 구멍에 물레 쇠가락을 꽂아 넣어 호식장을 치렀다. (≪정선 여량면 지명유래≫, 여량면, 2010, 121쪽 '범바우골')
사북중·고등학교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바위가 흡사 범과 같아서 범바위라고 부른다. 옛날에 이 바위 밑 굴에서 호랑이가 새끼를 낳아 길렀다 해서 이 고을을 범바위골이라고 불렀는데, 이 명칭이 지명으로 자리 잡았다.(≪정선을 담다≫, 정성교육지원청, 2025, ‘범바우’)
살아가는 사람들은 호랑이에게 범바위가 있고 그 바위가 있는 골짜기라고 해서 범바위골이 되었다는 점은 같지만, 유래는 조금 다르다. 다만 범이 그곳에 살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백성들이야 범이 무섭긴 해도 더 극성스러운 탐관오리를 피해 숨어 살던 곳이라서 어쩔 수 없이 터 잡고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런데 실제 범바우를 찾아보면 대개 우뚝하니 솟은 커다란 바위다. 범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보아야 범으로 보일까 하고 고개를 삐끗 꼬게 되는 바위가 더 많다. 가령, 속초 영랑호에 있는 범바위는, 내 눈엔 어떻게 봐도 범으로 보이지 않는다. 내 생각이지만 ‘범처럼 크고 위엄 있는 바위’라는 은유 표현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벋은바위에서 말미암은 ‘벋바위’가 [벌바우], [벙바우], [범바우], [붱바우] 따위로 소리바꿈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좋은 뜻을 보태 ‘봉암(鳳岩: 봉황바위, 蜂岩:벌바위), 호암(虎岩: 범바위), 휴암(鵂岩: 부엉이바위)’ 따위로 둔갑하였다. 이것저것 다 떠나 단순히 커다란 바위라고 해서 ‘범’에 빗대어 ‘범바위’라고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아무튼 ‘범바위’로 소리가 굳자 ‘범(虎)’과 관련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보태지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땅이름은 문자로 붙잡기 전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수밖에 없다. 자연히 여러 입을 타면서 말놀이처럼 소리가 어금지금한 다른 말로 바꿔치기 하거나 바람이나 꿈 따위를 엮으면서 사실과 거리가 있을 수 있다. 더욱이 그럴듯한 이야기가 덧붙여졌을 때는 사람들 마음에 깊게 뿌리 내려서 다른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이처럼 이름은 남았지만 실제와 다른 땅이름은 수두룩하다. 황새여울에 황새 없고 시루봉에 시루 없고 밤재에 밤나무 없는 식이다.
비슷한 보기로, 정선읍 덕송리 월천동 앞에 ‘범여울’이 있다. 이 여울에도 범 이야기가 전해온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 어미 호랑이 한 마리가 새끼 둘을 데리고 여울을 건너려다 새끼 둘을 잃었다고 한다. 여울이 하도 세차서 한 마리씩 건넬 요량으로 한 놈은 큰 돌로 눌러 놓고 한 놈만 물고 건너가서 큰 돌로 눌러놓고 돌아오니 이미 새끼는 죽었더란다. 어미 호랑이는 울부짖으며 부리나케 다른 새끼가 있는 여울 건너편으로 갔지만 그 새끼마저 죽어 있었다고. 그뒤로 어미 호랑이가 밤마다 산에서 내려와 밤새도록 울부짖었다고 한다. 하지만 범여울은 여울이 크고 물살이 사납다고 해서 크고 사나운 짐승인 ‘범’에 빗대어 붙인 이름으로 보아야 한다.
호랑이를 가리켜 ‘산군’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조선총독부가 해로운 동물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깡그리 잡으면서 수십 년 만에 우리 땅에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했다. 호랑이는 범이라고 하며, 표범과 구분할 요량으로 칡범, 갈범(葛-)이라고 한다. 표범과 달리 호랑이 몸에 새겨진 무늬가 칡 덩굴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새끼 호랑이는 ‘개호주’, ‘산가시’라고 한다. 참고로 새끼 곰은 ‘능소니’라고 하는데, 개호주, 산가시와 마찬가지로 시나브로 사라지는 말 가운데 하나다.
※일러두기: 위 그림은 ≪팥죽 할멈과 호랑이≫(서정오 글, 박경진 그림, 보리, 1997)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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