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구치가 걸어온 소리의 길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100)

by 이무완

멀구치는 달리 몰구재, 몰구치, 뱅뱅이재, 병방치 같은 딴 이름들이 있다. 정선읍 남서쪽에 있는 귤암리에서 정선 읍내를 가자면 멀구치를 지나야만 했다. 지금은 고갯길 중간에 ‘병방치전망대’가 있다. 뱅뱅이재는 뱅뱅 돌듯 걸어 내려가야 하는 고개라고 해서 생겨난 이름인데, 멀구치에서 남서쪽으로 귤암리에 이르는 고갯길을 말한다. 고갯마루에서 서른여섯 굽이를 뱅뱅 돌아서 오르내렸다고 해서 ‘뱅뱅이재’라고 한다. 1990년대 1/50000 지도에 멀구치를 ‘병방치’로 적고 뒷날 ‘병방치전망대’가 생기면서 잘못이 그대로 굳어진 이름이다.

bbchi.jpg 병방치스카이워크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밤섬

북실리 사람들은 이 고개를 ‘멀구치’라고 했다고 한다. ‘멀구’는 머루를 가리키는 정선말이다. 전하는 말로는 이 고개에 머루덩굴이 많아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하지만 썩 믿을 만한 말은 아니다. 지역말로는 ‘머루’를 ‘멀구’라고 했다. <청산별곡>(고려)에 “멀위랑 다ᆞ래랑 먹고”라는 데서 보듯 머루는 ‘멀위’가 말밑이다. 이 말이 ‘멀위→ 멀애→ 머르→ 머루’로 소리바꿈한다. 조선 중종 때 최세진이 쓴 ≪훈몽자회≫(1527)에 ‘葡 멀위 포’, ‘萄 멀위 도’로 나온다. 딸린 풀이를 보면 “집에 있는 것은 ‘포도’라고 하고 산에 있는 것은 ‘산포도’라고 한다.(在家者曰葡萄 在山者曰山葡萄)”고 했다. 이때만 해도 ‘멀위’는 산에서 저절로 자라난 머루뿐만 아니라 일부러 키운 포도를 싸잡는 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머루와 얽힌 유래는 소리가 어슷해서 말재기들이 끌어들인 이야기로 보인다.


≪정선읍 지명유래≫(정선읍, 2012, 114쪽)에서 ‘멀구치’ 유래를 보자.


북실리 남서쪽에 있는 고개다. 일설에는 옛날 머루덩굴이 많아 생긴 이름이라고 하나 ‘멀구’는 ‘산’을 뜻하는 옛말 ‘’과 ‘곧’이 ‘산 고개’를 뜻하는 ‘재’와 더해져 ‘곧재’, ‘몰곧재’가 되었고, 이 말이 ‘몰구재’, ‘몰구치’가 되었다. 오횡묵(吳宖黙) 정선군수의 ≪정선총쇄록(㫌善叢瑣錄)≫에도 ‘몰구치’라고 나와 있다. 현재 조양강을 조망할 수 있는 스카이워크 전망대가 생기면서 병방치 전망대라는 이름을 쓰고 있으나 실제는 이곳이 멀구치다. 병방산은 멀구치 남쪽에 있는데, 1990년대 5만분의 1 지도에 멀구치를 병방치라고 잘못 표기하고, 멀구재에서 병방산 쪽으로 비탈을 타고 내려가는 곳에 뱅뱅이재로 부르는 길이 났다고 해서 병방치가 된 것으로 보인다.


≪정선읍 지명유래≫는 ‘(산)+곧(산)+재(고개)’를 말밑으로 봤다. 이 말이 ‘몰곧재→ 몰구재→ 몰구치’로 되었다고 한다. 일리는 있지만 산을 뜻하는 말을 굳이 겹으로 썼을까 싶다. 알다시피 옛말에서 산을 가리키는 말은 ‘(말, 몰, 멀, 마라, 마루, 모라, 모로, 모르, 모리…)’이 있고, ‘(모리)’에서 생겨난 ‘뫼(메)’가 있다. 나는 오히려 이 이름이 ‘+(으/의)+재’에서 말미암았을 가능성에 마음이 간다. 이때 ‘으/의’는 매김토씨다. 산마루에 있는 고개라는 뜻의 ‘몰으재’가 시간이 흐르며 ‘몰읏재’가 되고, 소리 내기 편한 방향으로 ‘멀굳재→멀구재→멀구치’로 바뀌어 왔으리라. 땅이름은 언제나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건너가며 더 소리내기 쉽고 한결 기억하기 좋은 쪽으로 찾아간다. 멀구치도 그러한 소리 바뀜의 길을 거쳐온 이름이라고 하겠다.


[일러두기] 이 글에서 처럼 붉고 굵은 글자는 아래아(•)가 홀소리로 든 글자이다. 위 사진은 멀구치에 있는 병방치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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