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땅의 기억이 만나는 곳, 민둥산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101)

by 이무완

정선군 남면에 ‘민둥산’이 있다. 해발 1,118미터인 정상 부근 억새밭은 거의 20만 평에 이를 만큼 넓어 우리 나라 5대 억새 명소로 손꼽힌. 하지만 정선군청 남면 ‘지명 유래’에서는 ‘민둥산’이란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말하지 않는다. ≪조선지지자료≫(1911), <조선지형도>(1917)를 비롯해 1990년 이전 기록은 두말할 것도 없고 2022년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낸 지도에도 민둥산 아래 ‘발구덕’이란 땅이름은 보이지만 ‘민둥산’은 안 보인다.

민둥산1917-2022.jpg

그렇다면 ‘민둥산’이란 산 이름은 언제부터 썼을까. 1991년 11월 12일치 ≪조선일보≫ 25면 <능선마다 은빛 물결: 억새풀 명산>이라는 기사에서 ‘민둥산’이란 이름이 보인다.


민둥산(1119m) 정선군 남면 별어곡과 증산 사이에 펑퍼짐하게 솟아있다. 수십 만평에 달하는 주능선 일원이 온통 키를 넘는 억새밭으로 뒤덮여 있어 산악인들로부터 전국 제일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능선을 따라 정상에 이르기까지 30여분이나 억새밭을 뚫고 걸어야할 정도. 또 정상에서 바라보면 북쪽 지억산으로 이어지는 긴 능선이 마치 황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억새군락으로 덮여 있어 탄성을 자아낸다.


어쩌면 ‘민둥산’은 1990년 이후에 와서 비로소 널리 쓰는 이름이 되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민둥산’은 어떻게 생겨난 이름일까? 이 이름이 생겨난 과정은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민둥+산’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배달말에 ‘민둥하다’는 말이 있다. 산에 나무나 풀이 우거지지 않아 반반하다고 할 때 ‘맨송맨송하다’, ‘맨동맨동하다’고 한다. ‘맨동맨동하다’보다 큰 말이 ‘민둥민둥하다’인데 민둥산은 산 모양이 민둥민둥한 산이라서 붙은 이름일 수 있다.


두 번째는 ‘민+동산’으로 해석해볼 여지가 있다. 18세기 기록엔 나무가 없는 산을 ‘믠뫼’나 ‘뮌산’이라고 했다. ‘믠’은 ‘믜다’에서 온 말로 앞가지로 쓴 말이다. 민꽃, 민무늬, 민소매, 민머리, 민갓, 민다지에서 보듯 ‘없음’의 뜻을 보탤 때 앞가지가 바로 ‘민(믠)’이다. ‘믠뫼·믠산’은 곧 ‘민뫼·민메·민산’은 풀이나 나무가 ‘없는’ 산이다. 1936년 11월 18일치 ≪조선일보≫ 5면에 보면, <조선어표준말모음>(13) 첫재, 가튼말>에서 “민둥산(名)禿山 믠둥산”으로 나온다. 뒤이어 “민머리(名) 白頭, 禿頭 믠머리”도 볼 수 있다. 한자 독(禿)은 ‘대머리’란 뜻이다. 이렇게 보면 ‘민둥산’은 ‘믠산’에서 온 말로 볼 수 있는데, ‘둥’은 어디서 왔을까 하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보면, 아이 동(童) 자를 쓴 ‘동산(童山)’이 있다. “초목이 없는 황폐한 산”으로 풀어놨다. 흔히 한자 동(童)을 ‘아이’로만 새기지만 ≪훈몽자회≫(1527)에 보면 “아 동 又山無草木曰童(또 산에 풀과 나무가 없을 때 ‘동’이라고 한다)”고 풀어놨다. ‘없음’을 뜻하는 앞가지 ‘민-’과 나무나 풀이 없는 ‘동산’을 붙여 ‘민동산’이라고 했다가 민둥산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동산’만으로도 벌거숭이산인데 굳이 ‘민-’을 덧붙였을까 하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내 보기엔 ‘동산(童山)’으로만 썼을 때 “마을 부근에 있는 작은 산이나 언덕을 가리키는 ‘동산(東山)’과 헛갈릴 수 있거니와 ‘헐벗은, 나무가 없는’ 뜻을 한결 또렷하게 나타낼 요량으로 ‘민-’을 붙였을 수 있다. 동해바다, 고목나무, 모래사장, 외갓집, 상갓집, 단발머리 같은 겹말이 생겨난 이치와 같다.

민둥산_훈몽자회 童-horz.jpg 앞에서부터 ≪훈몽자회≫(1527), ≪조선일보≫(1936. 11. 18. 5면 <조선표준말모음>), ≪조선일보≫(1936. 6. 27. 3면 <송충에게 전멸되는 송악산의 미관>


세 번째는 한자로 쓴 ‘민둔산(民屯山)’에서 소리바꿈으로 생겨났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정선군엔 ‘민둥산’이 셋이다. 억새로 유명한 남면 증산리 민둥산(1120.m) 말고 정선읍 동곡 생평지 뒤쪽(964m)과 임계면 임계리 성가마골 위 동쪽(938.7m)에 있는 산도 ‘민둥산’이라고 했다. 정선읍 동곡 생평지 뒤쪽 민둥산은 한자로 백성 민(民), 진칠 둔(屯) 자를 써서 ‘민둔산’이라고 했다. 땅이름에서 ‘둔’은 언덕이면서 펀펀한 땅을 가리킨다. 이처럼 산마루가 밋밋하고 펀펀하면서 두두룩한 둔지가 있는 산이라고 보면 ‘민둔산’이라고 했을 수 있겠다. 그렇게 보면 ‘민둔산’은 한자로 썼지만 소리를 정직하게 받아쓴 것일 수도 있다. 그뒤 ‘민둔산’이 ‘민둥산’으로 소리바꿈했다는 가정도 있을 수 있다.

민둥산들.jpg 정선군에 있는 민둥산으로 <조선지형도>(1917)에는 정선읍 봉양리에 있는 '민둔산' 말고는 이름이 없었다

그렇다면 땅이름을 밝힌 기록들에서는 말밑을 어떻게 보았는지 살펴보자. 정선읍 봉양리에 있는 민둥산은 ‘언나가리왕산’이라고도 한다. ≪정선읍 지명유래≫(정선읍, 2012, 94~95쪽)에서 산마루가 ‘완만한 구릉지대’라서 ‘민둥산’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동곡 동쪽 생평지 뒤에 있는 해발 964m의 산이다. 국립지리원 발행 지도에 ‘민둔산(民屯山)’으로 나와 있는 산으로 일반적인 강원도 산의 특징인 험준하고 수목이 빽빽한 모습과는 달리 석회암 지형으로 정상이 완만한 산 위에 구릉지대라고 해서 ‘민둥산’이라고 한다. 민둥산에는 남평리 도씨 집안에서 난 장수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민둥산 아래 북평면 남평리 오음봉 아래에 살던 도씨(都氏) 집안에 장사가 나자 집안이 망할 징조라고 하여 부모가 콩가마니로 눌러 죽였는데, 이와 때를 같이하여 남평리 나루 북쪽에 있는 용바우 아래에서 용마가 나와 주인이 죽은 줄 알고 이 산에 올라가 울면서 뒹구는 바람에 나무와 풀은 물론이려니와 산이 뭉개져버리고 정상 부위가 민둥하게 되었다고 해서 ‘민둥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산 정상에는 나무가 많지 않으며, 용마가 울면서 뒹굴었다는 ‘용마구렁’이 있다. 용마구렁은 땅이 움푹 파인 돌리네 지형이다. 민둥산은 ‘민둥재’라고도 부르며, 가리왕산에서 뻗은 줄기가 동남쪽으로 내려와 우뚝 치솟은 산이라고 하여 ‘언나가리왕산’이라고도 부른다. ‘언나’는 ‘어린 아이’를 뜻하는 말이다.


정선군 임계면 임계리에 있는 ‘민둥산’도 별다르지 않다.


성가마골 위 동쪽에 있는 해발 938.7m의 산이다. 펑퍼짐하게 솟아 있는 산인 민둥산은 주변의 험준한 모습과는 달리 이름 그대로 정상 부위가 완만한 구릉지인 곳이다. (≪정선 임계면 지명유래≫, 임계면, 2011, 146쪽)


여러 갈래로 살펴보았지만 ‘민둥산’은 어느 쪽이라고 딱 잘라 말하긴 쉽지 않다. 다만 민둥산은 대체로 석회암 지대에 있는, 산마루가 펀펀한 산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강원도 정선, 영월, 삼척, 동해는 내남없이 알아주는 석회암 지대다. 빗물이나 지하수에 석회암이 녹으면서 땅이 둥그렇게 꺼진 돌리네도 많고 구덩이도 많다. 남면에 있는 민둥산은 둥그스름한 산봉우리보다 그 둘레에 생겨난 돌리네로 해서 지역 사람들은 땅의 쓰임에 마음이 더 끌린 탓에 ‘민둥산’ 말고 ‘발구덕’(산에 생겨난 구덩이란 뜻)을 땅이름으로 써왔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나무가 없는, 벌거숭이산이라는 ‘믠산(禿山)’이나 ‘동산(童山)’의 영향이라고 풀기보다 그저 ‘산에 나무나 풀이 우거지지 않아 산마루가 반반한 산’이라는 뜻으로 ‘민둥-산’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낸 최근 지도조차도 ‘민둥산’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는 점은 그 반증이 아닐까 싶다.


발구덕.jpg 민둥산 '발구덕'

배달말 한입 더

민다지 [지역말] 덧붙인 꾸밈새(장식)가 없는 옷. =민옷.

민갓 [지역말] 갓 대신 쓰는 두건을 가리킨다.

민밭 [지역말] 아무 곡식도 심지 않은 채 비워 둔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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