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령’에 지워지는 이름 ‘피재’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112)

by 이무완

삼척시 하장면에서 태백시로 넘어가는 고개로 ‘삼수령’이 있다. 이 고개에 비가 떨어지면 남한강(골지천)과 낙동강(황지천), 삼척 오십천으로도 간다고 해서 ‘삼수령’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고개의 딴 이름은 ‘피재’다. 태백시는 ‘피재’보다 ‘삼수령’이라는 말을 더 자주 쓰는데 백두대간이 낙동정맥으로 갈라지는 곳이면서 황해와 남해, 동해로 흘러가는 물줄기가 여기서 갈라진다는 사실을 내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고갯마루에 세운 삼수령 표지판엔 ‘피재’라는 이름 유래를 다음과 같이 적어놨다.


옛날부터 황지지역은 도참설에 의해 “이상향”으로 여겨져서 시절이 어수선하면 삼척지방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기 위해 이 재를 넘어 피난을 온 고개라는 뜻으로 피재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피재’를 한자로 적은 이름이 피할 피(避) 자가 아닌 기장 피(稷) 자를 쓴 ‘직치(稷峙)’라는 점을 생각하면 말재기들이 지어낸 말장난으로 보아야 한다. 땅이름에서 ‘피’는 곡식 이름보다 비탈(빗달)을 뜻할 때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정선군 임계면에 ‘직원(稷院)’이란 데가 있다. 생계령부터 갈고개 아래쪽까지 넓고 길게 비탈진 땅 모양이라 본디 ‘피원’이라고 했다. 여기서 ‘피’는 ‘비탈’을 뜻하는 ‘빗’이 ‘핏, 피’로 되었다. 마파람, 새파람, 개펄에서 보듯 [ㅂ]은 거센소리로 바뀌면 곧잘 [ㅍ]으로 된다. ‘비(빗)’은 ‘벼랑’을 가리키는 말인 ‘별/빌’에서 왔다. ‘빌재/별재’에서 ‘ㄹ’이 떨어지면 ‘비재/벼재’가 되고 곧 ‘피재’로도 되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피재’의 ‘피’를 피 혈(血)로 뒤치면 ‘혈치(血峙)’로 성큼 건너뛰고, 다시 ‘혈치’를 지역말 소리인 [셜티]로 소리내면 ‘설치(雪峙)’로 둔갑하기도 한다. 그리곤 고개가 하도나 높고 그늘진 곳이라서 눈이 잘 녹지 않아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둘러댄다. 이는 배달말 땅이름을 한자로 받아적는 과정에서 엉뚱한 이름으로 바뀌고 거기에 새로운 이야기가 덧붙는다. 이를 한자로 받아적으면서 새로운 이름들이 생겨나는데 이를 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비탈이나 벼랑에서 온 고개 이름.png 비탈이나 벼랑에서 온 고개 이름

고개치고 비탈지지 않은 땅이 어디 있으랴. 그렇다면 피재는 무슨 까닭으로 비탈진 고개라는 ‘피재’라는 이름을 얻었을까.

피재는 해발 921미터로, 태백시 적각동에서 삼척 하장면으로 오가는 35번 국도가 지나던 고갯마루다. 서쪽은 매봉산(1,304.4m)과 금대봉으로 이어지는 높은 산줄기지만 이미 900미터가 넘는 높은 산들이 이어지는 까닭에 그닥 높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거기에 견줘 동쪽 산기슭은 촘촘하게 그린 등고선이 보여주듯 비탈이 매우 가파르고 낭떠러지에 가깝다. 결국 땅 모양이 고개 이름을 부른 셈이다.

땅이름에서 ‘빗’은 ‘빗달’에서 보듯 대개 ‘비탈’의 뜻으로 쓴다. 곧 땅이 펀펀하거나 반듯하지 않고 기울어진 상태를 말한다. ‘빗’은 ‘빗나가다, 빗기다, 빗금, 비스듬하다’에 그 흔적이 남았다. 피재는 ‘비재/빗재’로 시작해서 ‘핏재/피재’로 되었으리라. 여기에 더해 물줄기가 어디서 시작하느냐를 따지면서 ‘삼수령’이라는 이름도 얻었다고 하겠다.

피재.jpg 지도 출처: 조선지형도,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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