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118)
‘문래’라고 하면 먼저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문래동(文來洞)이 생각난다. 이곳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갓진 갈대밭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방직공장과 소학교가 들어서면서 마을을 이루었고, 8·15 광복 뒤 ‘문래동’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전하는 말로는 냇가에 모래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모랫말’이라고 했는데, 이를 한자로 받아적는 과정에서 ‘문래’가 되었다고 한다. 더러는 중국에서 목화를 들여온 문익점 아들이 이곳에서 ‘물레’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나 일제강점기 대규모 방직공장이 들어서면서 방직기를 가리키는 옛말 ‘물레’를 소리로 옮겨 땅이름이 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어느 쪽도 뚜렷한 근거를 갖춘 말로 보기는 어렵다.
<조선지형도>(1917)를 보면 시흥군 북면 도림리에 ‘沙村(사촌)’이 보인다. 우리말로 옮기면 ‘모랫말’이니, 문래동을 ‘모랫말’에서 비롯한 이름으로 보는 해석이 아주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다만 마을이 안양천(서쪽), 한강(북쪽), 샛강(북동쪽) 사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모래’보다는 ‘물 안’이나 ‘사잇말’에서 말미암은 이름으로 볼 여지도 있다. 한자 ‘沙’는 뜻으로는 ‘모래’이지만, 소리로는 [새]로도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지만, ‘물안’이 ‘물내(–內)’로 바뀌고, 여기에 ‘ㄹ’ 소리가 덧나 ‘물래’로 되었고, 광복 이후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문래(文來)’로 굳지 않았나 싶다.
말이 샛길로 샜다. 다시 본줄기로 돌아와 정선군 임계면에 있는 문래산의 말밑을 톺아 보자.
정선군 임계면에 해발 1,081.5미터에 이르는 문래산이 있다. ≪정선 임계면 지명유래≫(임계면, 2011, 256쪽)는 골지천을 끼고 병풍처럼 길게 늘어선 이 산의 본래 이름은 ‘물비산’으로, ‘물가의 벼랑산’이라는 뜻이라 한다. ≪조선지지자료≫도 이 산을 ‘물비산’으로 적었다. 여기서 ‘비’는 ‘벼랑’이나 ‘높고 넓음’을 뜻하는 말로 해석했다. 이 ‘물비산’이 한자로 뒤쳐 적는 과정에서 ‘문래산’이 되었고, 그 결과 ‘문필가를 배출할 산’이라는 뒷사람들 풀이가 덧붙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같은 책에 실린 ‘문래리’(255쪽)에서는 말밑을 다르게 설명한다. 문래리는 마을 주산인 남쪽 문래산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하면서, 이때 ‘문래산’은 ‘물내산’을 한자로 적은 것이며, ‘물이 휘돌아 흐르는 곳에 있는 산’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모든 땅이름은 본디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말이 먼저이 있고, 그것을 뒷날 한글이나 한자로 받아적은 결과 아니겠나. 그러한 점을 생각하면 ‘문래산’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의 이름에 이르렀을까. 아마도 ‘○○산 → 물비산 → 물내산 → 문래산’과 같은 변화를 겪지 않았을까. ‘물비산’을 앞자리에 놓은 까닭은 ≪조선지지자료≫(1917)에 이미 그 이름이 보이기 때문이고, ‘물내산’은 ≪임계면 지명유래≫(2011)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래산은 문래 마을 남쪽, 골지천 건너편에서 가파르게 솟은 산이다. 문래 마을(<조선지형도>에서는 ‘골지리’)에서 바라보면, 물가를 따라 병풍처럼 길게 둘러선 산이라는 느낌부터 든다. 그런 점에서 ‘물비산’이라는 이름은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더구나 비알(비얄), 빈달(비탈), 베루(벼루), 뼝대, 뼝창 같이 ‘비’가 들어간 지역말에서 보듯, ‘물비산’의 ‘비’를 얼마든지 ‘벼랑’으로 해석할 법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물비’가 어떻게 ‘물내’, 나아가 ‘문래’로 바뀌었는지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 지점에서 ‘물내산’이라는 이름이 앞자리에 놓일 말이 아니라, 이미 굳은 산 이름인 ‘문래산’을 다시 풀이하려다 생겨난 뒤늦은 설명이라는 의심이 든다. 1910년대 <조선지형도>부터 오늘날 지도에 이르기까지 줄곧 ‘문래산’으로 적어온 사실로 보면, ≪임계면 지명유래≫에 나오는 ‘물내산’은 ‘문래산’의 소리바꿈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애초 말밑은 ‘물비산’도, ‘물내산’도 아니었을 가능성도 물리치기 어렵다. 이를테면 ‘몰+(에/의)+산’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때 ‘몰’은 산을 뜻한다. 문래 마을에서 골지천을 건너편 산등선으로 보면 문래산이 둘레의 산들 가운데 가장 높다. <조선지형도>엔 자후산 높이를 1,083미터로 적었으나 오늘날 지도엔 904미터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문래산은 1,082.5미터로 이 일대에서 가장 높게 솟아 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뜻에서 ‘몰(산)+(으/의)+산’이라고 했고, 이 말이 ‘몰에산 → 모레산 → 무레산 → 물레산(물내산) → 문래산’처럼 바뀌었을 가능성도 떠올려 볼 수 있다. 물론 가정이다. 다만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 조심스레 꺼내 보이는 말이니, 혹 잘못 짚은 대목이 있다면 기꺼이 가르쳐주고 꾸짖어주시기 바란다.
뼝때 냇물을 끼고 바위로 이루어진 높은 벼랑. =벼루, 병때.
뼝창 냇물을 끼고 바위로 이루어진 높은 벼랑. =벼루. 벵창.
비얄 산이나 언덕의 경사가 가파른 곳. =비탈. 대체로 비탈보다는 비탈진 정도가 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