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땅이름이 되다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122)

by 이무완

개화기 소설 ≪금수회의록≫(안국선, 1908)에는 여러 동물이 나와 인간 세상을 비꼬고 비판한다. 그 가운데 제5석에 앉은 무장공자(無腸公子)는 배알도 없이 외세에 빌붙는 사람들에게 창자 없는 게만도 못하다고 게거품을 물며 나무란다. 이때 무장공자는 겉보기엔 번듯하지만 속이 빈 인물을 가리키는 말로, 게 생김새나 성질에 빗대어 나타낸 말이다. 사실 게한테도 창자가 있지만 없는 듯 보일 뿐이다. 게에게는 바르게 걷지 못하고 옆으로만 움직인다 하여 ‘횡보공자(橫步公子)’라는 별명도 있다.


게는 누구에게든 익숙한 바다생물이어서 배달말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옆으로 걷는 모양을 ‘게걸음’이라 하고, 괴로울 때 게 입에 이는 침을 ‘게거품’이라 한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다’, ‘게장은 사돈하고는 못 먹는다’ 같은 속담도 우리 일상 말글에서 볼 수 있다. 더욱이 ‘게’는 땅이름에 흔적을 남겼다. 한자로는 게 해(蟹) 자를 쓰는데, 몸이 자라면 허물을 벗는 습성에서 벌레 충(蟲) 자에 풀 해(解) 자를 더해 만들었다. 배달말로는 ‘게, 궤, 거이, 그이, 기, 끼’처럼 썼는데, 이러한 말 흔적이 땅이름에 영향을 준 보기가 적지 않다.


정선군 임계면 용산리에 있는 ‘해곡(蟹谷)’도 그 하나다. ≪정선 임계면 지명유래≫(임계면, 2011, 240쪽)를 보자.


건네들 남쪽 골지천 건너에서 동쪽으로 난 골짜기다. 골짜기 안쪽에서 갈라진 지맥이 ‘게형국’이라고 해서 ‘해골(蟹谷)’이라고 한다. 첩첩산중으로 오래 전 이곳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며 살던 곳이다. 햇골 안쪽 조개봉 일대 광산에서 규석을 실어 나르는 차들이 드나드는 곳이어서 요즘엔 ‘광산골’로 부르기도 한다.


풍수지리에서 ‘게 형국’은 가운데 몸통이 있고 양옆으로 집게발처럼 뻗은 땅을 이른다. 한 자리에 웅크리고 머무는 게의 습성과 연결지어 재물을 모으고 지키는 기운이 깃든 명당으로 여겨졌다. 골짜기 안으로 갈라진 땅이라 ‘기잇골’이나 ‘귓골’이라고 하다가 게 해(蟹) 자를 써 ‘해곡’이 되었고, 다시 ‘햇골’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진 듯하다.


이와 비슷한 보기는 다른 지역에서도 찾을 수 있다.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누산5리 ‘해평(蟹坪)’은 한강을 따라 게가 많이 올라오던 곳이라 ‘게들이’라고 했고,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해평’도 게가 많은 들판이라 ‘기들(게들)’이라 했다. 다만 ‘蟹’ 자 획수가 많아 쓰기 어렵다 하여 바다 해(海) 자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남산 해목령(蟹目嶺)도 고개 아래 게 눈처럼 생긴 바위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결국 ‘게’는 작은 생물이지만, 그 모습이나 습성이 우리 땅이름에 게처럼 숨어 있다. 옆걸음질치고 껍데기가 단단하며, 한 자리에 웅크리는 성질은 풍자가 되고 빗댐이 되었으며, 골짜기나 마을 앉음새를 설명하는 땅이름으로 남았다. 해곡엔 자연을 바라본 옛사람들 마음과 삶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곧 땅이름은 그 땅에 깃들어 살아온 사람들이 그 땅을 해석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벼랑골이 아닌 벌 마을, 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