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9) 고지병, 고제병, 곶, 뼝, 뼝창, 뼝대
고지병은 설운골 어귀에 있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가리킨다. ≪동해시 지명지≫(2017)에는 ‘고제병’(高梯屛)으로 올려놓고 “높은 사다리로 병풍을 친 듯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306쪽)이라고 했다. 이런 설명은 곧이곧대로 뒤친 한자 풀이일 뿐 땅 생김새나 배달말은 살피지 않은 게으른 해석이다.
내 생각이지만 한자 이름인 ‘고제병’보다 앞서 배달말 이름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잘 알다시피 한자는 서기 전부터 이 땅에 들어와서 6세기에 이르러 문자로 뿌리 내린다. 675년에 이르러 신라 경덕왕은 예부터 써오던 땅이름을 두 마디로 된 한자 이름으로 죄다 바꿔 버린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배달말 땅이름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벼슬아치나 구실아치들은 한자 땅이름을 썼지만 땅에 엎드려 땅을 파먹고 살던 백성들은 입에 붙은 배달말 땅이름을 그대로 썼다. 지금도 광역시나 시․군․구 이름이 아닌 마을이나 골짜기, 구석진 데 있는 작은 땅 이름들은 손때 묻은 배달말로 많이 남았다.
그런 까닭에 고제병은 고지병에서 생겨난 말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고지병은 어떻게 생겨난 말일까. ‘고지’라는 말은 ‘곶’에서 온 말로 볼 수 있다. ‘고지병’은 ‘곶처럼 생긴 벼랑’이다. ‘곶’은 “바다 쪽으로, 부리 모양으로 뾰족하게 뻗은 육지”라고 뜻매김하지만 실제 땅이름에서는 평평한 들판으로 뻗어 나간 산줄기를 가리키기도 한다. 가령 ‘곶산’은 ‘길게 내리뻗은 산줄기’다. ‘곶산’이 ‘꽃산’이 되고 한자로 적으면서 ‘화산’(花山․華山)으로 건너뛰기도 한다. 또, 매김토씨 ‘-의’가 끼어들면 ‘꼬츼산’(곶-의-산), ‘꼬치산’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 ‘곶’은 수평 방향으로 길게 뻗어간 땅이나 산줄기만 뜻하지 않고 위아래 방향으로 ‘길게 생긴 생김새’를 가리키기도 한다. 곶바우는 곶처럼 길게 생긴 바위다.
‘병’은 벼랑에 뿌리를 둔 말로 보인다. 땅이름에서 벼랑은 다양한 꼴로 나타난다. ≪조선지지자료≫(강원도 3, 1911)에 보면 ‘새베루’(新硯洞․신연동), ‘흑벼루’(土峴․토현), ‘벼리실’(別於谷里․별어곡리) 같은 땅이름을 볼 수 있다. 베루, 벼루(베루), 벼리(베리), 별, 별오(벼로) 같은 말은 모두 벼랑을 가리킨다. 이들 말을 한자로 뒤치면서 연(硯·벼루), 성(星·별), 별량(別良), 별우(別隅), 별어(別於)로 적었다.
≪동해시 지명지≫ 풀이처럼 바위가 사다리로 병풍을 친 듯 위아래 방향으로 길게 생겼기 때문에 ‘곶’으로 보았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곶+의+별’로 쪼개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말이 ‘고즤별>고지별’처럼 된 다음 뒷날 뜻도 살리고 소리도 살리는 ‘고제병’으로 받아적지 않았을까 싶다. 만우골 마을에서 느릅재로 가다가 왼쪽으로 논이 많은 골짜기를 가리켜 ‘내매골’이라고 하는데 이 이름은 ‘남의골(남어골)’에서 왔다. ‘남어골>남에골>나메골>나매골’에서 매김토씨 ‘의’(어/아)가 붙어 생겨난 이름인 셈이다. 또 산골을 ‘산의골’이나 ‘사내골’ 따위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배달말 한입 더
‘뼝대’란 말이 있다. 정선 지역 말인데, 배달말 사전에선 찾아볼 수 없다. 국립국어원 ‘우리말샘’에서 “「방언」 바위로 이루어진 높고 큰 낭떠러지(강원)”로 풀어놨다. 이 말을 동해나 삼척 지역에서는 ‘뺑창, 뼝애, 뼝, 뺑’이라고 한다. ‘뼝밑, 붉은뼝애, 뺑골, 뼝꿈(뺑굼)’ 같은 땅이름에서 볼 수 있다. ‘뼝/뺑’은 벼랑을 뜻하는 토박이말 ‘별’이나 ‘벼랑’에서 생겨난 말로 보인다. 잘 알다시피 벼랑은 ‘별’에 뒷가지 ‘-앙’을 붙여 만든 말이다. ‘벼랑’이 ‘병’으로 줄어든 뒤 ‘뼝, 뺑’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울, 담, 병풍으로 새기는 한자 병(屛)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다. ‘붉은뼝애’는 뼝이나 뺑만으로 벼랑의 뜻을 나타내기 어렵다고 여겨 한자 벼랑 애(崖)를 붙인 말로 보인다.
말난 김에 벼랑 애(崖) 자를 쓴 한자말 몇 가지도 같이 들어 본다. 고애(高崖)은 '높은 벼랑', 봉애(峯崖)는 '산의 험하고 가파른 언덕', 절애(絕崖)는 '깎아 세운 듯한 가파른 낭떠러지', 현애(懸崖)는 '깎아지른 듯한 언덕'이다. 또 '마애불'은 바위 절벽에다 새긴 불상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