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13) 느릅재, 유치, 유령, 유현
[일러두기] 이 글에서 밑금 그은 붉은 글자는 옛 배달말 적기에서 쓰던 아래아(.)가 든 글자다.
오래 전 ≪느릅골 아이들≫(임길택, 산하, 1994)을 읽으면서 임길택 선생님을 닮고 싶었다.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면서 살고 싶었다. 그런 까닭이었을까, 느릅골이라고 하면 임길택 선생님이 먼저 떠오르고 이야기에 나오는 아이들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리는 듯하다. 임길택 선생님(1952~1997)은 정선군 군대분교를 시작으로 정선과 태백에서 교사로 일한 분이니 느릅골은 강원도 어느 산골 마을이 배경이겠거니 했는데 경상남도 거창군 어디라고 해서 무식을 탓하며 마무리한 기억도 난다.
즙이 느른히 늘어지는 나무
느릅나무는 잎떨어지는 넓은잎 큰키나무로 우리 땅 어디에서나 아름드리로 잘 자라는 나무다. 먹을거리가 없을 때 가난한 백성을 먹여 살려온, 고마운 나무다. ≪삼국사기≫(권45, 열전) ‘온달전’에도 나온다.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네 집을 찾아가는데, 온달의 어머니는 “누구 속임수에 빠져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아마도 온달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산과 숲으로 느릅나무 껍질(楡皮)을 벗기러 간 듯한데,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습니다”하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559~560) 때 사람이니, 우리 조상들은 이미 천오백 년 전부터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양식으로 먹고 때로는 약으로 썼다.
그렇다면 ‘느릅’이란 말은 어떻게 생겨난 말일까?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조민제 외 편저, 심플라이프, 2021, 493쪽)에 ‘느릅나무’란 이름은 “옛날에는 이 나무의 속껍질을 벗겨서 물이 짓이겨 전분의 점액을 식용하는 등 구황식물로 이용했는데, 이때의 끈적끈적한 성질이나 모양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느릅나무 껍질에서 배어 나온 즙이 마치 풀처럼 느른히 늘어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 셈이다.
느릅재, 느릅나무가 있던 고개
느릅나무 햇잎을 따서 국을 끓이고, 줄기 껍질과 열매, 뿌리는 약으로 쓰고, 줄기를 구부려 소코뚜레로 쓸 만큼 넉넉하고 우리 곁에 친근한 나무인 탓인지 ‘느릅’이 들어간 땅이름이 꽤 흔하다. 동해시에도 ‘느릅골’이 있고 ‘느릅재’라는 곳이 있다. 느릅나무 유(楡) 자를 쓴 땅이름도 지천으로 널렸다. ≪동해시 지명지≫에서 ‘느릅재’를 찾아보자.
이 재는 골이 깊고 물이 많이 나와 늪이 생긴다고 하여 늪재였는데 나중에 변해 느릅재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한자를 楡嶺(유령)으로 적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오히려 느릅나무와 관련이 있어 생긴 지명이 아닌가 생각한다.(23쪽)
골말과 만우동 본말 중간 지점에 있는 해발 150m의 재. 한자로는 楡嶺(유령)으로 적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느릅나무가 있던 재라는 뜻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추정된다.(111쪽)
마치 전혀 딴 곳처럼 말해놨지만 사실은 한 곳이다. 물이 많이 나와서 늪이 있어 ‘늪재’였다가 뒷날 ‘느릅재’로 되었다는 말은 생뚱맞고 뜬금없다. 고갯마루라고 해서 늪이 없을까 마는 줏대없이 소리에만 끌리다보니 이 꼴이 났다. 그나마 ‘느릅나무가 있던 재’가 솔깃하긴 하다. 하지만 이 땅 어디나 느릅나무 자라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한다면 느릅나무가 웬만큼 많지 않고는 '느릅재'란 이름은 머쓱해질 뿐이다. 더구나 ≪조선지지자료≫(강원도 3, 강릉)를 보면 더욱 미심쩍은 마음이 든다.
느릅골: [망상면 발한리] 楡谷(유곡)/너름골
느릅재: [망상면 망상리] 楡峙(유치)/느롭재
느릅내: [정동면 유천리] 楡川里(유천리)/느름내
한자 ‘楡’(유)의 새김이 어째서 다 다른가. ≪동해시 지명지≫ 설명처럼 ‘느릅나무’가 말밑이라고 하면 ‘너름, 느롭, 느름’과 같은 말은 어떻게 봐야 할까. 오랜 말로 고개나 길이 느릿하면서 길 때 ‘늘어진다’고 하고, 이를 이름씨꼴로 바꾸면 ‘늘음/느름’이 된다. 또, 땅이나 터가 두루 넓다고 할 때는 ‘너르다’고 하고 이름씨꼴로 바꾸면 ‘널음/너름’처럼 된다. ‘느롭재’ 바로 밑에 있는 골이 '느롭골’이 아닌 ‘너름골’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고갯길이 느른하게 이어진
느릅재(느롭재)는 느른한 고개일까, 길이 너른 고개일까? 느릅내(느름내)는 느른하게 흐르는 내일까, 폭이 넓은 내일까? 느릅골(너름골)은 느른한 골짜기일까, 품이 너른 골일까?
이럴 땐 땅 생김새를 봐야 한다. 느릅재는 고갯길이 길게 늘어졌다고 해서 붙은 고개 이름이다. 느릅재는 남서쪽 예천봉(368미터)에서 북동쪽 어그레봉(282미터)으로 흐르는 산줄기를 가로지르는 고갯길이다. 지금이야 넘나드는 사람이 드물지만 조선 시대엔 평릉역(동해시 평릉동)과 낙풍역(강릉시 옥계면 낙풍리)을 잇는 관로였다.
강릉시 유천동을 흐르는 유천(느릅내)도 내가 느른하게 흐른다 하여 붙인 이름으로 봐야 한다. 곧게 내려오던 냇줄기가 유천리에 와서 땅이 평평해지면서 흐름은 느려지고 이리저리 뒤틀 수밖에. 물론 ‘디지털강릉문화대전’은 “위촌천[죽헌천 상류]이 흘러가는 냇가에 느릅나무가 많이 있어서 마을 이름을 느릅내라고 하고 한자로 ‘유천(楡川)’이라고 한다”고 적었다. 땅 생김새는 병아리 눈곱만큼도 살피지 않은, 아주 게으르기 짝이 없는 설명이다.
그런데 ‘느릅골’는 조금 다르다. ≪조선지형도≫(1907~1917)에서 보듯 느릅골은 느릅재 고갯마루 남서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등고선 간격이 다른 곳에 견줘 넓다. 그만큼 땅이 비스듬하긴 해도 제법 평평하면서 너른 골짜기로 보면 ‘너른골’이요 산줄기가 느른하게 늘어진 땅으로 보면 ‘느릅골’로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동해시 지명지≫ 설명처럼 느릅재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서 ‘느릅골’이라고 했을 수도 있다.
말이 공연히 길어졌지만 ‘느릅골’, ‘느릅재’, ‘느릅내’, ‘느릅실’ 같은 땅이름은 말소리가 어슷한 탓에 ‘느릅나무’를 끌어와 말밑을 어설프게 설명할 데가 많은데 대부분 느릅나무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다. 땅 생김새를 보면 산줄기나 냇줄기가 길게 늘어진 곳이다. 이런 곳은 ‘느릅’ 뿐만 아니라 ‘늘, 느름, 느릿, 느랏, 느리, 느루’ 따위 말을 넣은 이름이 나타나기 일쑤다. 조금 다른 말이긴 하지만 동해, 삼척에서 써온 오랜 말에 '느리먹다'가 있다. 양식을 아낄 요량으로 밥 대신 죽을 끓이거나 좁쌀이나 나물, 국수 따위를 섞어 양을 늘여 끼니를 에울 때 썼다. 이 말을 '느루먹다'고 한 듯하고 '느르먹다'고도 한 듯하다. 이는 지역말에서 '느리'와 '느루', '느르'처럼 홀소리 바뀜이 매우 흔하게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배달말 한입 더
느른하다 「1」 맥이 풀리거나 고단하여 몹시 기운이 없다. 「2」 힘이 없이 부드럽다.
느른히 「1」 맥이 풀리거나 고단하여 몹시 기운이 없이. 「2」 힘이 없이 부드럽게.
느릿하다 동작이 재지 못하고 느린 듯하다.
느리다 기세나 형세가 약하거나 밋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