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23) 달동네, 산동네
며칠 전 한 신문에서 ‘‘서울 마지막 달동네’ 노원구 백사마을 철거 시작’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달동네’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며 드라마 ‘서울의 달’ 등 수많은 작품의 배경이 됐던 노원구 백사마을의 철거가 시작됐다.(가운데 줄임) 백사마을은 1960년대 후반 서울 도심 개발의 여파로 용산, 청계천, 안암동 일대의 철거민들이 이주해 형성된 달동네다.(≪동아일보≫ 2025. 3. 14. 14면, 위 사진도 이 기사에서 따옴.)
잘 알다시피 백사마을은 주소인 산104번지를 따서 지어낸 이름이다. 1967년 도심을 개발하면서 생겨났다. 삶도 비탈에 있는 사람들이 산비탈에 둥지를 틀고 주워온 판자쪽으로 바람구멍을 막렸다. 하늘 아래 첫동네라서 그랬는지 ‘달동네’란 이름을 얻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산등성이나 산비탈 따위의 높은 곳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라고 풀어 놨지 따로 말밑은 밝히지 않았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설명한 말 뿌리는 이렇다.
달동네라는 이름은 높은 곳에 위치해 달이 잘 보인다는 뜻에서 붙여졌는데, 광복 이후 조국을 찾아 귀국한 동포들과 남북 분단 이후 월남한 난민들이 도시의 산비탈 등 외진 곳에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달동네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경제개발이 급속하게 추진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라 할 수 있다.
달동네란 말의 말밑을 두고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 이를테면 방바닥에 누우면 허술하게 지은 천막 사이로 달이 잘 보인다고 해서, 새벽 달 보고 나갔다가 저녁 달 보고 들어온다고 해서, 상자를 겹쳐놓은 듯 좁다란 달세방(하꼬방, はこ방)이 다닥다닥 많다고 해서 생겨났다고들 한다. 혼자 생각이지만 달이 잘 보이는 동네라면 해도 잘 보이고 별도 더 잘 보이지 않을까. 그런 잣대로 보면 ‘해동네’나 ‘별동네’라고도 할 법한데 그런 말은 없지 않나. 산을 뜻하는 고구려말 ‘달’의 흔적이라는 너스레도 떠도는데 너무 나갔다 싶다. 산동네와 달동네를 어금지금한 뜻으로 쓰니 고구려말 ‘달’과 엮어 생각해봄직도 하다. 하지만 이 말은 1980년대 초 드라마 <달동네>가 크게 인기를 끌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산동네를 가리키는 대이름씨로 굳어졌다. 그러니 그닥 믿을 만한 말은 아니지 싶다.
내남없이 ‘달동네’라고 하면 머리속에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비탈진 곳에 지붕 낮은 집들이 따개비처럼 붙고 좁다랗고 가파른 골목길이 얽힌 마을이다. 돈도 집도 땅도 없는 사람들이 와서 뚝뚝딱딱 벽을 치고 살던 데가 주로 산비탈이었던 까닭에 달동네 하면 대개 산동네와 겹친다. 우리 귀에 익은 달동네를 한번 떠올려 보라. 통영시 동피랑벽화마을, 인천시 괭이부리말, 부산시 감천문화마을, 동해시 논골담길마을이 모두 산비탈을 따라 생겨난 마을이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는 백사마을도 다르지 않다.
철 지난 신문들을 보면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 ‘달동네’라는 말이 자주 보인다.
TV연속극으로 일약 유행어가 된 「달동네」는 말 자체부터 무허가주택촌을 연상케 해주고 있다. (가운데 줄임) 서울의 경우 60년대 초반 도심에서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에다 8~10평 규모의 땅을 주어 강제로 정착시켰다.(≪매일경제≫ 1981. 6. 16. 11면 ‘무허가주택(중) 양성화 계기로 본 실상과 대책’)
TV연속극 이후 「달동네」로 불리는 영세민촌. 수도 서울에는 서민들이 모여사는 집단촌이 여기저기에 있다.(≪동아일보≫ 1984. 7. 30. 5면 ‘달동네 지붕밑의 애환’)
이들 달동네는 변두리에 있는 ‘무허가주택촌’으로 ‘영세민, 서민’이 모여 사는 비참한 동네를 가리키는 새말(신조어)이요 시쳇말(유행어)이었다. 드라마 <달동네>는 1979년 1월 28일치 ≪조선일보≫ 5면에서 보듯 특집 드라마로 첫 방영을 한다. 그런 까닭에 1981년 7월 22일치 ≪매일경제≫ 5면 <산동네 사람들>에서 나온 해석은 그럴 듯하다.
요즘 신조어로 「달동네」라는 말이 있다. 산동네의 별칭이다. 언뜻 그 말의 뜻을 짚어보면 지대가 높아 달을 이고 살아간다는 뜻에서 붙여진 낭만적인 이름 같기도 하지만 그 실은 밝고 따뜻한 햇빛을 등지고 살아가는 어둡고 그늘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달동네>를 쓴 작가인 나연숙이 이 말을 처음 지어낸 말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을 지어낸 사람은 따로 있다. 다름 아닌 고 백기완 선생(1932~2021)이시다. 백기완 선생이 <오마이뉴스>와 2008년 2월에 한 인터뷰에서 ‘달동네’라는 말 때문에 빨갱이로 몰려 어려움을 겪었다고 떠올리는 대목이 있다. 일제에게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고 다섯 해가 지난 1950년대 초 야학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치던 때다.
“마침 눈이 오고 달이 뜨니까 깨진 잿더미가 그렇게 예쁘더라고.” ‘달동네’란 말이 떠올랐고, <달동네소식>이란 유인물을 만들어 돌렸다. 그러나 경찰은 그를 끌고가 거꾸로 매단 채 발로 차며 ‘빨갱이’로 몰았다. ‘너 빨갱이지!’ ‘내가 왜 빨갱입니까?’ ‘달동네라고 그러면 되냐 하꼬방이라고 그래야지.’ ‘그건 왜말인데요?’ ‘왜말 싫어하는 거 보니까 빨갱이야.’ 일주일 동안 실컷 매 맞고 나왔다.
“그 뒤로 어떻게 된 게 달동네란 말은 요새 어느 소설 보니까 나오고 방송에서 쓰는 사람도 더러 있고 그러더라고. 우리 신경림 선생 시에는 달동네가 아니고 산동네 그랬더라고. 산동네도 좋지만 달동네가 좀 문학적이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도 해보는데, 뭐 내 말 들어? 내 말 안 들어요.”(<영어천재에서 ‘우리말 쓴 빨갱이’로 진보 큰어른의 칼칼한 ‘호통 댓거리’> 2008. 2. 8.)
빙빙 돌아왔지만 이제 환해졌다. 멀쩡히 사람 사는 데를 가리켜 ‘빈민촌’이니 ‘판잣촌’이라고 깎아내리기에 달을 보고 사는 곳이라고 백기완 선생이 지어낸 말이 목숨을 부지하다가 나연숙 작가가 쓴 드라마 덕에 살아났다. 요컨대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 개발로 높은 데로 높은 데로 떠밀려 온 곳이 대개 달을 이고 사는 산동네라서 붙은 땅이름으로 볼 수 있다.
김광섭이 쓴 <성북동 비둘기>는 성북동 달동네를 ‘개발’하면서 둥지를 잃고 쫓겨나는 산비둘기를 글감으로 쓴 시다. 개발이라는 이름에 쫓긴 산비둘기들은 거리로, 광장으로, 옥상으로, 고가다리 아래로 내쫓긴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가운데 줄임)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서울 마지막 달동네라는 곳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또 다른 달동네를 찾아, 지하방, 옥탑방, 쪽방으로 성북동 비둘기처럼 쫓겨 다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