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24) 말란골, 도둑골, 누른내
동해시 땅이름을 살피다 보면 고기말란골, 누른내나는골, 도둑놈숨아난골 같은 재미난 이름들이 보인다. 자연스레 말밑이 궁금하다.
고기말란골부터 보자. ≪동해시 지명지≫에는 승지동에 있는 골짜기로 “세기밭골 아래쪽의 골짜기”라고만 짧게 적어서 골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다. 옛말에 나무에 올라가 고기를 찾는다는 말이 있다. ‘연목구어’(緣木求魚)라고도 하고 ‘상산구어’(上山求魚)라고도 한다. 나무에 오르든 산에 오르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굳이 하려고 할 때 쓰는 말이다. 그런데 산으로 첩첩 둘러싸인 승지동에 ‘고기말란골’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1980년 4월 1일로 동해시가 되기 전 옛 묵호읍은 오징어, 명태, 노가리(새끼 명태), 양미리, 정어리가 넘쳐나던 곳이고 묵호항 뒤편뿐만 아니라 곳곳에 오징어나 명태(노가리)를 말리는 덕장이 있었다. 오늘날 황태덕장으로 이름난 곳을 보라. 인제군 북면 용대리나 대관령 횡계리 같은, 바다에서 뚝 떨어진 높고 깊은 산골짝 아닌가. 내설악 칼바람이 눈보라를 일으키는 용대리 황태덕장은 전국 황태 생산량의 70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러니 산골짝이라고 해서 고기 말리는 덕장을 두지 말란 법도 없다.
그래서 고기말란골은 어떻게 생겨난 말인가 살펴보았다. 내 보기에 ‘고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고기(魚, 肉)가 아니다. 이때 ‘고기’는 높을 고(高) 자와 터 기(基) 자를 써서 높은 데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쓴 듯하다. 그러면 고기말란골을 ‘고기+말란+골’ 짜임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뒤따르는 ‘말란’은 ‘말랑’의 뜻 같은 말로 볼 수 있다. ‘말랑’은 ‘높다, 크다, 으뜸’을 뜻하는 ‘마루’가 말밑이다. ‘마루’는 ‘고갯마루, 산마루, 용마루’에서 보듯 등성이를 이루는 지붕이나 산 따위의 꼭대기를 가리킨다. ‘마루’가 ‘말랑’을 거쳐 ‘말란’으로 소리 바꿈이 일어난 셈이다. 그런데 ‘고기’라는 말이 한자라서 소리만 듣고 얼른 높은 데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 다가오지 않고 ‘고기’란 말과 섞갈리면서 여기에 배달말 ‘말랑/말란’을 붙여 ‘고기말랑골’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말하자면 겹말이다. 배달말에서 겹말은 한자말 같은 들온말 때문에 생긴다. 함성소리, 한옥집, 박수 친다, 다시 재발하다, 남은 여생, 매 주마다, 상을 수상하다 같은 말엔 못 배운 사람들 마음이 담겼다.
한편, 승지동에는 ‘도둑놈숨아난골’이란 골도 있다. ≪동해시 지명지≫에 보면 “승지동에서 바라볼 때 사태골에서 왼쪽에 있는 골짜기. 도둑놈이 숨었다는 데에서 유래한 지명. 숨기에 안성맞춤한 골짜기다”(126쪽)라고 했다. 사태골은 예천봉(348.1m)으로 오르는 골짜기다. 첩첩산중이니 숨기에 좋은 곳이긴 하나 배달말 정서로 보면 '도둑'은 실제 도둑이 아닐 수 있다. 땅이름에서 ‘도둑’은 흔히 ‘돋음’(솟아오름)이란 뜻을 나타낼 때가 많다. 불쑥 돋아오른 곳 너머 숲 안골이라는 뜻으로 쓰던 말인데,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도두 너머 숲 안 골>도둑넘숨안골>도둑눔숨어난골’처럼 된 듯하다. 배달말에 ‘도독하다’가 있다. ‘가운데가 조금 솟아서 볼록하다’는 말인데, ‘도도록하다’의 준말이다. 그런데 ‘도독늠, 도독고네이, 도독질’이라는 지역말에서 보듯 ‘도둑’은 곧잘 ‘도독’으로 소리바꿈하여 나타나는데 이와 관련이 있을 듯하다.
대구동 할미골 맞은편 위쪽 골짜기에 ‘누른내나는골’이라고 있다. ≪동해시 지명지≫에 “너구리가 많아 너구리 썩는 냄새가 많이 나는 골이라는 데에서 연유한 이름”(362쪽)이라고 아주 성의 없게 풀어놨다. ‘누른내’는 짐승에게서 나는, 달갑지 않은 기름기 냄새를 말한 듯하다. 표준어로는 ‘누린내’라고 한다. 너구리는 혼자 살지 않고 무리 지어 산다. 똥 자리를 정해두고 그곳에서만 똥을 누는 습성이 있고, 위험하다 싶으면 비리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오줌을 뿌리고 꽁무니 내뺀다. 하지만 이 냄새를 ‘누린내’라고 말하진 않는다. 내 생각으로는 늘어지듯 냇줄기가 느릿느릿 흘러나오는 골짜기라서 붙은 이름으로 보인다.
배달말 땅이름을 톺아보면 한자로 쓴 땅이름과 달리 땅에 무늬를 그리며 살아온 백성들의 삶과 해학이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