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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러가는 지르매재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26) 지르매재, 지르메장골, 길마

by 이무완

※ 위 사진 출처: 픽사베이.


동해시 지흥동에 ‘지르매재’라고도 하고 ‘기르매재’라고도 하는 고개가 있다. 지흥동 쟁골에서 이 고개를 넘으면 이로동 지르메장골이다. ≪동해시 지명지≫를 찾아보면 이름 유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쟁골에서 초록봉 쪽으로 오르는 능선에 있는 재. 이 고개를 넘으면 비천동으로 가게 된다. 고개 모양이 소의 등에 짐을 얹기 위해 사용하는 길마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르매재 능선은 소가 누워 있는 와우형(臥牛形)이라 한다. (동해시 지흥동 ‘지르매재’, 278쪽)


삼밭골 위쪽에 있는 골짜기. 이 골짜기로 넘어가면 동해대학이 나온다. 골짜기 모양이 소가 짐을 싣고 갈 때 지는 지르메처럼 생겼다는 데에서 붙은 이름이다. (동해시 이로동 ‘지르메장골’, 184쪽)


서로 다른 쪽에서 말해놓았지만 지르매재와 지르메장골은 동떨어진 곳이 아니다. 이로동 쪽에서 지르매재를 오르자면 지르메장골을 지나야 한다. 그래서 지르매재로 오르는 골에 있는 마을이라서 '지르메장골'이다.


소 등에 얹힌 길마를 닮은 고개?

소 등에 짐을 얹을 요량으로 씌우는 농기구 이름이 ‘지르메’인데 표준어로는 ‘길마’라고 한다. 소 맨등은 둥글기 때문에 그냥 짐을 올릴 수 없다. 그래서 짚으로 멍석처럼 짠 언치를 깔고 그 위에 길마를 씌운 다음 짐을 얹었다. 그래야 짐을 실어도 등에 배기지 않아 소도 얌전하다. 길마를 얹지 않고 언치만 얹기도 했는데, 이는 정철이 쓴 시조에서 볼 수 있다.


재 너머 셩권롱 집의 술 닉닷 말 어재 듯고 (재너머 성권농 집에 술 익었단 말을 어제 듣고)

누은 쇼 발로 박차 언치 노하 지즐 타고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만 놓고 눌러 타고)

아해야 네 권롱 겨시냐 뎡좌슈 왔다 하여라 (여봐라, 네 권농 어른 계시냐 정좌수 왔다 아뢰어라)


말이 헛길로 샜지만 땅이름에서 보듯 동해와 삼척 말에서 ‘지르매/지르메’라고 했는데 지역에 따라 ‘지르마, 질마, 질매’라고도 했다. 친일시인인 서정주가 1976년에 낸 ≪질마재 신화≫에서 ‘질마’도 길마를 가리키는 전라북도 고창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아야 길마와 골짜기가 어슷해 보일까. ≪조선지형도≫를 보면 지르메재는 가운데가 불룩한 말굽쇠(∩ )모양의 길마가 아니라 가운뎃자리가 우묵한 ∪ 모양으로 길마를 뒤집어놓은 듯하다. 그런데도 지르매(길마)라고 해야 할까. 땅이름 유래를 말하자면 무엇보다 이름에 앞서 이름이 들어간 곳의 땅 모양부터 살펴보는 게 순서다. 내 보기에 “고개 모양이 소의 등에 짐을 얹기 위해 사용하는 길마”를 닮아서 생겨났다느니 땅 생김새가 누운 소 모양이니 하는 이름 유래는 ‘지르매재’라는 소리에 끌려 뒷날 지어낸 말로 보아야 한다.

지르매재.jpg ≪조선지형도≫(1914~1917)

목, 에우지 않고 질러가는 길

애초 질러가는 목이라서 ‘지르다+목’을 ‘지르목’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지르목→ 지르목이→ 지르맥이→ 지르매기→ 지르매’처럼 되지 않았을까 싶다. '목'은 길목, 골목, 노루목, 갯목 따위 말에서 보듯 다른 곳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중요하고 좁은 곳을 가리킨다. 지도에서 보듯 쟁골에서 비천마을로 가자면 남쪽으로 빙 둘러 가는 길과 서쪽 산을 넘어가는 길이 있다. 남쪽 길은 고개를 넘지 않으니 품은 덜 들어도 시간은 곱절로 들 테고 서쪽 길은 고개를 넘는 품은 들어도 멀리 돌지 않고 가깝게 질러 가니 시간을 벌 수 있다.

배달말 ‘지르다’는 “지름길로 가깝게 가다”는 말이다. ‘지름길’은 빙 에워서 돌지 않고 곧장 질러 가는 길이다. 길 가는 사람치고 누구든 시간으로나 거리로나 짧은 길로 가려고 한다. 빙 돌아갈 때는 가로막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나 거리를 줄일 수 있다손 쳐도 품은 더 들 수도 있다. ‘기르매재’는 ‘지르매’가 ‘기르마’, ‘기르매’에서 온 말로 여겨 뒷날 지어낸 말로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鞍(안)’이란 한자를 ‘안장’으로 새긴다. 안장은 말이나 나귀 등에 얹어서 사람이 타기 좋도록 한 물건이라고 했다. 그런데 ≪훈몽자회≫(1527)에 보면 ‘鞍(안)’을 ‘기르마 안’으로 새겼다. 지역 말을 보면 ‘기름’이 ‘지름’으로, ‘기와집’이 ‘지와집, 재집’으로, ‘길다’가 ‘질다’로 소리바꿈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

그러니까 ‘지르매재’는 질러가는 목이 있는 고개라는 말이다. 지르메장골은 지르매재로 오르는 긴 골짜기 마을인 셈이다.

지르매재_기르마 안.jpg ≪훈몽자회≫(1527)에는 ‘鞍(안)’ 자를 '길마'가 아닌 '기르마'로 새겼다.



배달말 한입 더

에움길 굽은 길. 또는 에워서 돌아가는 길.

에우다 다른 길로 돌리다.

지르다 지름길로 가깝게 가다.

질러가다 지름길로 가다.

가로지르다 어떤 곳을 가로 등의 방향으로 질러서 지나다.

언치 말이나 소의 안장이나 길마 밑에 깔아 그 등을 덮어 주는 방석이나 담요.

권농(勸農) 조선 시대에, 지방의 방(坊)이나 면(面)에 속하여 농사를 장려하던 벼슬아치.


#지르매재 #지르메장골 #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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