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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터와 갈밭과 갈전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34) 가래터, 갈밭, 갈전

by 이무완

동해시 비천동에 있는 ‘가래터’라는 곳이 있다. 한자로는 ‘갈전(葛田), 갈전동(葛田洞)'이다. ≪동해시 지명지≫(2017)에 나온 풀이를 보면 싱겁기 그지 없다.


매봉산에서 무릅재 쪽으로 있는 마을이다. 웃빈내에서 동북 방향에 위치한 매봉산 밑의 마을이다. 예전에는 40여 가구가 살던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1가구만 살고 있다. 흔히 한자 지명 갈전으로 불리며 가래터라고도 하는데, 예전에는 갈전동(葛田洞)으로 호칭하기도 했다. (동해시 지명지, 138쪽, 비천동)


‘가래터, 갈전, 갈전동’ 같은 마을 이름만 있지 왜 그 이름을 붙였는지는 알 수 없다. 지체 높고 유식한 양반들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 삶에서 길어낸 땅이름을 제 편한 대로 덧칠하기를 좋아한 까닭에 숱한 땅이름이 이리 비틀리고 저리 꼬였다.

그렇긴 해도 ‘가래터→ (갈터/갈밭)→ 갈전ㆍ갈전동’처럼 바뀌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수 있다. 다만 가래터에서 어떻게 갈전으로 훌쩍 건너뛰었는지 알쏭달쏭하다. 비슷한 땅이름 보기를 ≪삼척향토지≫(김정경 편저, 배재홍 옮김, 삼척시립박물관, 2016, 45쪽)에서 찾아보자. 두 곳 모두 삼척시 하장면에 있다.


갈전리(葛田里), 칡덩굴[葛蘿]이 번성함으로 이 이름이 되었다.

추동리(楸洞里), 예전에 추라동(楸羅洞)이라 불렀다(가래나무[楸木]가 무성함으로 이 이름이다).


칡덩쿨이 번성하고 가래나무가 많은

‘갈전’은 칡 갈(葛) 자, 밭 전(田) 자를 썼다. ‘칡덩쿨’과 이어 생각해봄직하다. ‘칡’은 ≪향약구급방≫에 ‘즐’(叱乙: 질을)로 나온다. ‘즐’은 무엇을 묶거나 동이는 데에 쓸 수 있는 가늘고 긴 물건으로, 지금 말로는 ‘줄’이다. ‘즐’이 ‘츩’(훈몽자회, 1527)을 거쳐 ‘칡’이 되었다. 동해와 삼척 말로는 ‘칠기, 칠개이’라고 했다. 칡에도 수칡과 암칡이 있다. 어릴 적 미끈하면서 씹을 때 질기고 맛이 씁쓸한 칡은 ‘나무칠기’(수칡)라고 했고, 통통하면서 즙이 달고 많이 나는 칡은 콩칠기(암칡)라고 했다. 이러한 지역 말에 기대어 칡이 무성한 곳이라고 이름을 붙일 요량이면 ‘가래말, 가래터, 갈밭’이 아니라 ‘칠기말(칡말), 칠기골(칡골), 칠기실(칡실), 칠기굼(칡굼)’이 되어야 한다. 자연히 땅이름은 ‘칡밭→ 갈밭→ 갈전’과 비슷한 차례로 바뀌어야 한다. 곧 갈전이나 갈전동에 쓴 갈(葛) 자는 뜻으로 쓰지 않고 소리를 빌려 썼다는 반증이다. 백 걸음 물러나 실제로 칡이 많았을 수도 있지만 ‘칡’이라는 뜻에 매달리면 ‘가래터’가 ‘갈전’으로 바뀌는 데서부터 막힌다.

생각을 바꿔 말밑을 ‘칡’이 아니라 ‘가래’로 보면 ‘가래’가 무엇을 뜻하느냐는 물음이 생긴다. ‘가래실, 가래울, 가래골, 가래밭 같은 땅이름을 한자로 쓸 때는 흔히 가래 추(楸) 자를 쓴다. ‘가래’를 가래나무 열매로 여겨 흔히 가래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유래가 판박이처럼 따라 붙는다.

하지만 ≪조선지형도≫에서 보듯 갈전(갈밭)이나 추동(가래말)은 칡이나 가래나무와는 그다지 소리 닮음 말고는 별 연관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갈전리와 추동리 (지도 출처: 조선지형도)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지는 법

그렇다면 ‘가래’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말일까. 그 실마리는 다름 아닌 길에 있다. 갈전도 추동도 가래터도 죄다 길이 모였다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자리에 있는 마을들이다. 다시 ≪삼척향토지≫ 갈전(葛田)과 추동(楸洞)을 설명한 대목을 눈여겨 보자.


갈전/ 칡덩굴[葛蘿]이 번성함 → 葛蘿: 칡 , 벌 갈라

추동/ 추라동(楸羅洞)이라 불렀다 → 楸羅: 가래 추, 벌 가(ㄹ)라/갈라


둘다 ‘갈라’로 뒤쳐봄직하다. 우리 옛말에서 산줄기나 강줄기, 길 따위가 갈래갈래 나누어지는 것을 ‘가리다’라 했다. 말줄기인 ‘가리-’는 ‘가르, 가라, 가락, 거리, 거르, 가래, 갈래’ 따위로 곧잘 둔갑한다. ‘가리-’가 줄면 ‘갈’로 된다. ‘갈-’을 길이나 산, 냇줄기가 갈린다는 뜻으로 보고, 길이 난 모양이나 땅 생김새를 살피면 본래 뜻에 한결 더 가까워진다.

이제 첫머리에서 남겨 둔 문제로 돌아가서 ‘가래터’라는 마을 이름을 다시 살펴보자. 1910년대 지도인 ≪조선지형도≫에 ‘가래터’는 ‘갈전동’으로 나온다. 이 마을도 길이 남북으로 갈리는 곳이다. 남쪽 아래빈내(소비천)와 웃빈내(대비천)에서 북쪽 강릉 옥계면 남양리로 질러가는 갈림길에 있는 산마을이다. 이 곳에서 길은 네 갈래로 갈린다. 가래터는 땅 생김새로 보나 말로 보나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곳이다. 갈전이라는 허튼 땅이름은 두말할 것도 없이 게으른 구실아치들이 [갈] 소리에 끌려 지어낸 이름이라고 하겠다.

가래터를 ≪조선지형도≫에서는 갈전동으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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