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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음 Jul 30. 2024

펜은 칼보다 강하다(2)

원고를 자르다

난 펜을 가졌다!

너희들이 가지지 못한 펜을 나는 가졌다.

지금은 피 흘리며 맞아주지만 각오하라!

너희들의 이름을 영원히 새겨주마!

오늘 있었던 이 모욕과 절망, 수모와 냉대를 한 자 한자 피로 새겨서

복수해주고 말 것이니 죽지 말고 살아있으라!

그때는 오히려 내게 와서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 것이다!


난 주먹을 꽉 쥐었다. 내 눈동자는 이글이글 살기를 띠며 변해갔다.

내가 믿을 것은 오로지 펜밖에는 없다.

 펜이 나의 神이다.

      ㅡ 서른셋, 일기장 내용中 에서 ㅡ


격랑의 파도가 넘실거릴 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운전을 하다가 4차선 횡단보도 신호 대기 중에 차량을 멈추었다. 보닛에서 연기가 솟아났다. 그녀는 음악을 듣고 있었고 앞차에서 나오는 매연이라고만 생각했다. 점점 연기가 심해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자기 차량에서 새어 나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갑자기 공포가 엄습해 왔다. 비상 깜빡이를 켜고서 횡단보도 한복판에  멈추었다. 한 손으로는 보험회사에 전화하며, 또 한 손으로는 다른 차량들에게 손을 휘저으며 돌아가라고 수신호를 다. 시끄러운 차량들 소음에 통화 내내 악을 써야만 했다. 시동을 끄자 더 이상 연기는  나지 않았다.

4차선 도로에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도와줄 사람하나 보이지 않았다. 다들 남의 일이라는 듯 아슬하게 그녀를 비켜 지나갔다. 진땀이 났다.

그게 첫 신호였다. 그녀 인생이 캄캄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시작했다는 암울한 신호탄이었다.  


격랑의 파도가 삼킬 듯 덮쳐올 때

불가항력의 운명이 소용돌이칠 때

그녀는 볼펜에 힘을 주며 주문을 외우곤 했다.

이 파도가 잔잔해지면

저 소용돌이가 멈추어지면  

언젠가는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웃으 말하는 날이 올 거라고.

햇빛 따스한 창가에서 오늘의 이야기를 책장을 넘기며 읽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그날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펜 대신 칼을 들다

"아악!"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거품으로 가득 찬 커다란 주방 설거지 통에 맨손을 넣었다가 칼이 들어 있는 줄 모르고 그대로 찔리고 말았다. 하필, 칼끝이 위로 향하게 놓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피가 철철 흐르면서 하얀 거품이 붉게 물들었다. 깊게 찔린 것 같았지만 그녀는 대충 휴지로 감싸 안았다. 고무장갑 속에 면장갑을 하나 더 낀 채로 마저 그릇을 닦았다. 고무장갑 속에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왼손 엄지손가락 손톱에서 계속 피가 흘렀다. 손톱이 잘린 채 시뻘건 살점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려오는 통증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왼손을 바닥에 내려놓으면 통증이 어깨를 타고 올라왔다. 통증을 누그러뜨리고 싶어서 왼손 엄지손가락을 향해 입김을 계속 불어넣었다.


울었다.

너무 아파서 울었다. 아파서 울다니... 고작 손이 베였다고 울다니...

울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오늘밤처럼 피 흘리며 눈물을 흘리던 날들을 이제 더 이상 기록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젠 쓰지 않겠다고.

 글보다 밥이 먼저라고.

글 쓰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라고.   

그날 밤 그녀는 고통에 굴복하고 말았다.


중학생 시절부터, 이십 대, 서른 중반에  이르기까지 결코 꺾이지 않았던 그녀의 신념은 고작 엄지손톱이 잘린 고통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마는 것을.

 겨우 이까짓 것을 신념이라고 믿었다니. 아까운 청춘을 낭비하다니... 되지도 않는 글에 헛힘을 쓴 시간들이 허탈했다. 개코나, 실력도 없는 주제에 글 쓰는 게 무슨 큰 벼슬이라도 되는 양, 암행어사의 마패처럼 휘두르며 풍차를 향해 돌격하는 돈키호테가 바로 자신이었다. 그녀가 생각해 봐도 어처구니없었다. 신념이란 게 이렇게 가벼운 것이었나 싶어 코웃음이 났다.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은, 평범한 인생을 거부한 대가일지도 모른다고.

 내 운명이 꼬이게 된 것은 문학에 인생을 통째로 걸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문학밖에 몰랐기에 다른 기술이나 취업자격증을 따지 못해서 이렇게 설거지 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깨닫게 되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손이 아려와서 잠드는 것은 포기했다. 그녀는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가위를 들고 써두었던 원고뭉치를 잘랐다. 속상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후련했다. 두꺼운 원고 뭉치들은 마치 중학생 시절부터 삼십 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감지도 않고 자르지도 않은 채 길러왔던 머리카락 같았다. 자랑처럼 길러왔던 머리카락은 땅바닥에 질질 끌리다 못해, 다시 종아리를 타고 치렁치렁 감아올라 목을 옥죄여오는 거목의 뿌리들 같았다.


 원고를 자를 때마다 괴물의 촉수처럼 뻗어있던 뿌리들이 싹둑싹둑 잘라지는 느낌이었다. 자르면 자를수록 가벼워지면서 시원했다. 이렇게 통쾌할 줄 알았다면, 이렇게 가벼워질 줄 알았다면 진작 자를걸, 내친김에 삭발까지 하고 싶은 맘이 솟아났다. 습작 원고들이 잘려나가는 데는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설거지 통에서 손이 베인 날 찬란한 청춘의 신념도 함께 잘려나갔다. 가위의 칼날 앞에 펜으로 눌러쓴 원고들은 조각조각 흩어졌다. 방바닥엔 오려진 글자들이 그녀처럼 피를 흘리며 흩뿌려졌다. 욱신거리던 손가락의 고통이 점차 가라앉았다.

아직도 살이 벌어져서 시뻘겋게 부어오른 손을 위로 치켜들고 한 손으로 세수를 하고 화장을 했다. 병원에 가서 꿰매는 것을 포기했다. 이 고통을 오래도록 새기고 싶었다. 살점이 그대로 드러난 엄지 손가락을 대일밴드 몇 장으로 가린 채 다시 주방으로 들어섰다.


하루종일 설거지 통을 벗어나지 못했다. 종이 커피 한 잔을 마실 여유도 없이 칼을 들고 양파를 자르고 대파를 잘랐다. 물 마를 새 없이 빠르게 움직이며 그릇을 닦았다.

 

책과 쌀 중에 쌀을 골랐다. 책과 과일 중에 과일을 집었다. 글을 쓸 시간에 영화를 보았다. 글을 쓸 시간에 술을 마셨다. 습작할 시절에는 파리하고 음습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녀가 책대신 쌀을 선택하자 얼굴이 점점 환해졌다.


 친구들은 이제야 사람 같다고 했다.

그 말에 그녀가 웃음을 보이자 친구들은 또 말했다.

"웃는 얼굴이 참 예쁘다. 웃으니까 여자 같네."


주인을 기다리며

격랑의 바다를 죽을 듯 살듯 헤엄치며 살아오느라 글도 잊고 책도 잊었다. 돌솥을 나르며 모아 두었던 책들은 작은 집에서,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다니느라 계속 버려야만 했다.

 책을 버릴 때마다 그녀의 살점이 뚝뚝 잘려 나가는 것 같았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작아지는 살림살이가 마침내 대여섯 개의 종이박스, 캐리어 두 개로 남았을 때 그녀의 청춘도 끝이 났다.


마지막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택시를 잡아타고 산사를 향해 가던 날 그녀는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주택가 전봇대 쓰레기 더미옆에 기대어 놓았던 책들을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함께했던 강아지를 전봇대에 묶어놓고 도망치는 기분과 흡사했다. 강아지는 이미 주인이 자기를 버리고 떠난다는 사실을 직감한듯했다. 짖지도 못하고 멀어져 가는 주인을 체념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주인이 떠난 뒤로도 오래도록 색이 바래진 채로 멈추어있었다. 혹시나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젊은 날에 들이닥친 일련의 사건들.


큰오빠의 갑작스러운 죽음.

 참척당한 어머니의 발병과 죽음.

새벽녘 대형병원 응급실에서 마주한 둘째 오빠의 끔찍한 사고.

일 년 여의 간병생활.

차량이 밀리는 곳에서만 일어나는 공황발작장애.

속세를 접고 떠난 귀의처에서 쫓겨남.


먼 훗날 그녀는 젊은 날을 회상하며 변명처럼 말한다.


칼에 손이 베이던 날, 원고를 잘랐던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만약 자르지 않았다면 폐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랜 지하 조직에서 탈퇴하고자 할 때, 확고한 결별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를 절단하여 바치듯,

그녀는 그렇게 흉터를 남겨둔 채로 문학을 떠났다.

청춘을 떠났다.


내 밥 주는 자리가 진정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거야 말로 신념이 아니겠는가!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말이다.

<설산의 표범처럼 살라하네> 연재는 30화,'세상은 망해도 글은 남는다'(3부)를 마지막으로 다음 주 화요일에 종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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