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사진에 대한 애정표현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 -황동혁, 조그만 사랑노래
학생 때 나는 이과생 중에서 드물게 문학, 특히 현대 시를 좋아했다. 그때 배운 시들 중 몇몇은 19년 인생의 내공으로는 와닿지 않았던 감성이 있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살면서 문득문득 배웠던 것들이 떠오르면서 되새김질할수록 그 의미와 메타포가 진하게 와닿는 것이 종종 있다.
그중 황동혁 시인의 작품은 살면서 떠오르는 시들과는 조금 다르게 학생 때부터 이미 빠져버린 감성이었다. 쉽게 쓰여져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시인의 시 중 '쉽게 쓰여진 시'가 있다). 그리고 그 시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진하게 퍼져 나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나는 필름 카메라에 꽤 오랫동안 애정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 필름카메라는 내가 말을 배우기 훨씬 이전부터 나의 시각에 있었다. 아빠의 청년 시절 꽤 깊게 파고들었던 취미였고 (어릴 때 오빠와 나를 찍은 사진들에 신기한 필름 카메라의 촬영기법들이 들어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 기법이 들어간 사진은 cg만큼 신기한 것이었다)
엄마가 아빠만큼의 기술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나와 오빠의 성장과정을 빈틈없이 기록하면서 옆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후 초등학교 때부터 아빠의 수동 필름 카메라를 깔짝깔짝 손대다 중학교 때 흑백 필름 촬영 및 암실 인화 체험을 하게 되면서 사랑에 빠졌고 아빠의 카메라는 이제 90% 이상 나의 손에 있게 되었다. 대학은 건축학과를 진학하게 되었는데 마침 학과의 동아리에 흑백 필름 사진동아리가 있어 일말의 고민도 없이 가입하게 되면서 필름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암실도 없어지고 그 성격이 필름 사진에서 그냥 사진으로 바뀌었지만 그 당시에는 암실 체험과 사진에 대한 세미나를 통해 꽤 많은 공부가 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에 대한 감상과 그 정의를 내리지만 내가 생각해 온 필름 사진은 황동혁 시인의 시에 나오는 ‘어제를 동여맨 편지’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에게 영향을 주던 ’ 길‘같은 존재들은 사라지기도 하고 늘 그 자리에 있던 것들이 나에게는 더 이상 새롭게 보이지 않아 인식조차 하지 못한 존재로 남게 되지만, 필름 카메라로 찍은 순간들이 시간이 지나 그 컷이 쌓여 인화를 하게 되면 그 당시 내가 피사체를 보며 느낀 감정이 날것처럼 되살아나 나에게 물밀듯이 다가온다.
나는 순간의 감동으로 카메라를 빠르게 들어 그 순간을 남겼다. 그러나 그 “캡처” 이후에 당시의 깊고 일렁이던 감정은 시간에 휩쓸리며 그 향기가 희미해지고, 나의 기억에서 밀려날 때쯤 현상된 필름이 사진과 함께 나에게 전달되면서 그때의 벅차던 감정을 잊지 말라며 어제의 감정을 동여매서 오감+공감각 까지 살아있는 상태로 전해준다.
하여 나에게 필름 사진은, 현실에 물들어 색을 잃어가는 나의 세계에 주기적으로 찾아와 어제의 감정을 일깨워 주며 다시 색을 칠해주는 것이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사는 동물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이 말은 추억과 감정이 인생의 원동력인 나에게는 더더욱 공감이 가는 문구이다.
번거로운 프로세스와 아날로그적인 손맛이 비효율적이라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만 이러한 과정으로 시간차를 두고 전해지는 사진들이 나에게, 그리고 필름 사진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