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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소유 Jul 26. 2023

기억속의 첫 노래방

어쩌다 나는 노래방 중독자가 되었는가

 작가의 첫 기억은 흥미롭다. 수능 백일주를 마시던 김혼비 작가의 첫 술자리는 '아무튼 술'에 담겨 많은 이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들었고, 박완서 작가의 첫 사랑은 '그남자네 집'이라는 걸출한 소설이 되어 한국문학에 이름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김영하 작가는 청탁받은 글을 쓰기 위해 유년을 곰곰 떠올려 보려 했지만 연탄가스를 마셨던 10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는데, 하기사 생의 첫 기억이나 유년에 대한 글은 어딘가 아련하고 달콤해 반복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주제다.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장난을 치던 모습, 가족과 함께 하는 식사같이 따듯한 첫 기억을 담은 글부터 첫 탄생 직후 발에 닿던 대야와 따듯한 물에 대해 서술한.. 다소 방정맞을 정도로 극적인 기억을 뽐내는 글도 있으니 말이다. 나도 그런 글을 읽다보면 끙끙대며 생의 첫 기억을 되짚어보려 하지만, 이렇다할 장면을 처음으로 꼽기가 쉽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옛집에서 부터 나의 첫 기억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옥상에 올라가 눈사람을 만들던 겨울이나 그 뒤엔 꼭 시원한 동치미에 삶은 고구마를 먹던 것, 해가 잘 드는 오후면 안방에 나를 앉혀놓고 부들부들하고 질 좋은 화선지를 꺼내 매일 그림을 가르쳐주던 할머니의 모습. 아직 아기였던 동생과 자기 주장이 확실했던 언니만 부모님과 함께 자고 나만 조부모님과 같은 방에 지내던 시절이었는데, 아마도 우리는 환상의 콤비였던듯 하다.

 아직도 아침에 일어나서 뽀뽀뽀를 보고 있으면 '쟤는 깨우지 않아도 자기 보고싶은걸 저렇게 잘 찾아본다'며 칭찬하시던 조부님들의 진심어린 칭찬이 기억난다. 나는 얼토당토않은 칭찬에 뿌듯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 진지하게 티비를 시청했고, 조부모님은 더 없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내 뒤통수를 바라보셨다. 나는 사랑이 고팠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콩깍지가 잔뜩 끼어있었으니 그보다 좋은 궁합은 없었다. 어린 나는 늘 왼쪽엔 할아버지, 오른쪽엔 할머니를 두고 새근새근 잘 잤고 또래보다 더 크게 쑥쑥 자라났다. 첫 기억이 인간의 성격과 무의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하던데, 확실히 사랑이 많고 뻔뻔한 사람으로 자라난데엔 그 덕이 있으리라.     

 한 시절로 기억되는 유년과 달리, 몇몇 첫 기억들은 지나치리만치 생생하다. 예를 들어 인생의 첫 거짓말이 그렇다. 요즘 학교나 유치원에선 '꿈끼 발표회'같이 한껏 겸양을 떠는 이름으로 선생님들의 피땀이 들어간 장기자랑을 포장하곤 하지만, 당대의 유치원에선 '재롱잔치'라는 직관적인 이름으로 어린이들의 춤과 연기를 뽐내는 자리를 마련했다.

 온동네에 애들이 넘쳐나던 호시절이라 7살은 빨강 1반부터 2반까지, 6살은 노랑 1반부터 3반까지 어린이들이 바글거렸다. 당시 빨강 2반이던 나는 재롱잔치를 준비하는 내내 한가지 충동에 시달렸는데, 스트레스 볼 같이 물렁한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탬버린을 딱 한번만, 있는 힘껏 꽉 깨물어보고 싶었다.

 부디 이해해주시라. 당시 나는 7세였고 가짜 탬버린은 촉감이 말랑한데다 적당한 탄력이 있는데 반짝이는 장식을 달아놔서 아주 매혹적이었다! 그리고 걸핏하면 맹연습이 이어지던 어느 날, 결국 나는 충동을 참지 못했다.

 연습이 끝나고 다 함께 반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시간이었다. 마침 주변엔 이쪽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선생님들은 바빴으며 나는 연습에 들뜨고 지쳐 있었다. 매력적인 기회의 순간, 나는 모두의 눈을 피해 가짜 탬버린을 와앙 깨물어 버렸다. 예상했던대로 적당한 탄력감과 입에 닿는 말랑한 식감은 아주 기분이 좋았고, 가짜 탬버린에는 동그란 반달모양 잇자국이 남았다. 불편한 기쁨이 지나간 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준비물을 넣어두던 통에다 증거물을 천연덕하게 반납한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범죄란 없는 법. 반납까진 완벽했으나, 재롱잔치에 심혈을 기울이던 선생님들이 가짜 탬버린에 생긴 결함을 알아채지 못할리 없었다. 바로 다음날 평소엔 상냥하지만 화가나면 매섭게 돌변하던 빨강 2반 선생님은 범인 색출을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의심스러운 몇몇 남자아이들을 호되게 추궁하셨고, 나는 그 옆에서 얌전떼기처럼 모른척 열심히 춤을 연습했다. "네가 아니면 누군데!"라며 잇자국이 선명한 탬버린을 흔들고 계신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속에는 깨물지 말걸하는 후회와 대신 혼나고 있는 친구를 향한 미안함, 불편함과 죄책감이 부글부글거렸지만 내 몸은 그저 깜찍한 동요에 맞춰 성실히 흔들렸다. 아아. 어쩌면 좋아.

 결국 나설 용기가 없었던 비겁한 나는 끝끝내 진실을 실토하지 못했다. 그리고 간식시간이 되어서야 안절부절 못하며 혼난 친구에게 내 몫으로 나왔던 빈츠 하나를 가져다주었고, 친구가 씩씩대며 초콜릿을 입에 까넣는 것으로 내 인생의 첫 거짓말이 마무리 되었다.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졌지만 아주 오래가진 못했고,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하며 여태까지 스무해를 더 살았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의 말로일까, 아니면 말랑했던 가짜 탬버린과 한을 품은 어린이의 저주일까. 4년 뒤, 처음으로 '진짜 탬버린'을 만난 순간 나는 노래방과 탬버린에 반해버렸다.     

 11살이면 한창 사회 활동이 활발할 나이다. 부모님이 생업으로 바쁘시고 언니와 동생도 각자 자라느라 바쁘던 시절, 나도 우정과 사교활동에 열심이었다. 적은 나이만큼 관계에 미성숙한 어린이들 사이에서 확실한 우정의 증거 중 하나는 생일파티에 초대하는 것이었고, 나도 가끔은 친구들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아 학원이나 숙제는 미뤄두고 방탕한 하루를 즐기다 오곤 했다. 그때만 해도 키즈카페 같이 어린이들만을 위한 장소가 없었으니 생일파티는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거나 피자, 햄버거등 패스트푸드점에서의 식사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후엔 놀이터나 방방에 간다거나 준비한 게임을 하는 시간도 이어지기 마련이었지만, 가끔 세련된 부모님이 있는 집에선 새로운 컨텐츠를 준비해오기도 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그 전에 먹은 식사는 무엇이고 우리가 누구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는지도 희미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식사후에 노래방에 갔다는 것이다. 너댓쯤 되는 어린이들과 두명의 어른(아마도 주최자 어머니와 친한 어머님이 아닐까)은 들뜬 발걸음으로 첫 노래방에 방문했다.

 공교롭게도, 초저녁의 노래방 화면에서는 성인용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수영복을 입고 뛰놀던 금발의 여성들은 어쩐 이유에선지 어깨 끈을 쭉쭉 잡아 당기며 아랫도리를 벗을랑 말랑 뇌쇄적으로 화면을 노려보았고,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꼭 한번씩은 젖꼭지를 내어보였다. 낯선 여자들의 젖꼭지를 이렇게 많이 마주치기는 처음이라 어린이들의 눈이 휘둥그레해진 사이 두 명의 어른은 후다닥 카운터로 달려갔다. 물론 모두 알다시피, 어린이들은 생각보다 기가 세며 그런것에 굴하지 않는다. 기다릴 이유가 딱히 없다고 생각했던 우리는 당황한 어른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곧 신나게 놀기 시작했다. 노래방에 와 본적이 있었던 친구가 제법 야무지게 선곡을 하고, 우리는 어지럽고 화려한 해변을 바라보며 노래를 했다. 반나체의 여성들은 확실히 어린이들에게 좋은 광경이 아니었지만 흥미롭긴 했다.     

 다행히 2000년대 초반엔 어린이도 따라부를만한 노래도 제법 유행이었고 부를 노래는 많았다. 가사의 대부분이 한글인 거북이의 노래나 전국을 강타했던 버즈의 겁쟁이 정도는 모두가 소리 높여 부를 수 있었다. 음계나 박자를 잘 지키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아 어설픈 어린이들의 노랫소리는 금방 노래방의 음기와 습기를 쭉쭉 빨아들였다. 절절한 이별도 어른의 센치함도 모르는 당당함으로, 가요의 과잉된 감정과 눈앞의 숭한 화면은 곧 빠르게 희석되었다. 두 보호자가 되돌아 왔을 땐 펄펄 뛰며 마이크 유무에 관계없이 합창을 하고 있는 우리가 있었고, 어른들은 그제서야 한숨을 돌렸다.

 성인영상들이 자연과 풍경으로 대체된 뒤 어린이들은 쉬운 노래들을 따라부르며 폴짝폴짝 뛰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처음으로 어른들을 따라 어색하게 탬버린을 손에 쥐고 흔들었다. 처음 본 모양의 새빨간 템버린은 모양이 예뻤지만 어린이 손엔 조금 쥐기 힘들게 옆이 크고 무거웠다. 거기에 익숙해 지느라 애를 먹기도 잠시, 노래를 부르는 것 만큼 템버린을 치는것도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쓸데없이 절절한 김종국의 '한 남자'를 들으며 찰찰, 한번 더 쉬고 찰찰, 박자에 맞추어 손을 흔들었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박자를 잘 지키면 노래와 잘 맞게 흥취를 돋굴 수 있었다. 한 남자가 있어, 찰찰. 널 너무 사랑한, 찰찰. 그러나 이 평화로운 간격에 익숙해졌을 즈음, 1절이 끝나자 차르르르르 요란하게 탬버린을 흔드는 소리가 옆자리에서 들려왔고, 나는 그제서야 깜짝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어라, 저렇게 맘대로도?

 그리고 이어진 곡은 바로 '낭만고양이'였다. 발매된지 2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부르는 그 노래. 낭만적인 가사와 신나는 곡조로 남녀노소 모두가 부를 수 있는 그 노래. 일단 시작하면 앉아있을 수 없는 그 노래! 나도 모르는 사이 목청은 높아지고 빨간 탬버린은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노래부터 율동까지 아무것도 제대로 된 것이 없는 방 안에서 정신없이 탬버린을 흔들며 나는 홀로 전율했다. 아, 이것이야 말로 진짜 탬버린이구나. 여태 학교에서 배우던 누런 탬버린 처럼 4분의 3박자에 맞춰 모두가 동시에 찰찰 소리 맞추어 흔드는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맞는 타이밍에 내 맘대로 흔들어 재끼는 거구나! 그래도 되는 거구나! 그제서야 바깥 세상의 정박자나 교과서적인 성실함과는 거리가 먼 노래방의 문법을 깨달은 나는 벼락맞은 듯이 기쁨과 즐거움에 가득차 환희했다. 이게, 이게 노래방이구나!

 열창이 끝난 후, 별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린이들은 최선을 다해 아는 노래를 부르다 결국 아는 가요가 동나자 동요를 부르다 못해 어머니의 애창곡인 이문세의 노래까지 불렀고, 금방 흥미가 떨어져선 다리를 통통 두드리며 집에 가자고 재촉했다. 나는 그 후끈한 열기와 요상한 분위기가 싫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쉬이 고개를 끄덕이고 순순히 노래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짜릿하고 환상적이었던 노래방에 대해 곱씹었다.

 첫 기억이 인간의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는 아들러의 주장처럼, 어쩌면 첫 노래방이 너무 강렬했던 나머지 사는 내내 노래방에 환장한게 아닐까. 그도 그럴것이, 11살의 첫 노래방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13살 겨울을 기점으로 나는 짬만 나면 노래방에 가는 사람처럼 살았다. 중간고사가 끝나서, 시간이 남아서, 애들이랑 노는데 딱히 갈데가 없어서, 친구가 어떤 노래를 부를지 궁금해서, 수작을 부리고 싶어서, 술이 적당히 올라서 노래방으로 향했다. 공부에 욕심도 있고 품행도 나쁘지 않아 어른들과 주변인들에게 제법 신뢰를 받는 사람으로 사는 동안, 다른 한편으론 그냥 평범한 노래방 중독자 였다. 중학교때는 빅뱅의 노래를 수록곡 부터 일본 발표곡까지 가사한번 보지 않고 전부 달달 불러낼 수 있었고, 고등학생이 되어선 울랄라 세션의 아름다운 밤에 맞추어 팔을 풍차 돌리듯 뱅뱅 흔들어 재끼는게 루틴이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난데없이 힙합이 유행하는 바람에 한국사 시험을 볼때보다 더 자주 거북선을 외쳤고, 직장인이 되고 나선 지나간 추억의 노래들과 새로운 유행가를 마구 섞어 부르는 복잡한 어른이 되었다.

 여전히 좁고 답답한 방에서 탬버린을 흔들면 얌전하고 기특한 나는 오간데 없다. 똘똘하고 성실한 학생도 근면하고 부지런한 직장인도 자취를 감춘다. 시절이 변해도 한결같이 답답하고 요상한 노래방 안에 있는 것은 그냥 노래에 맞춰 흔들흔들 몸을 흔드는 유쾌하고 가엾은 인간뿐이었다. 때로는 이루어낸 성취에 대한 기쁨과 다 미치치 못한 과업에 죄책감을 안고, 가끔은 설명하기 힘든 우울과 장난같이 들뜬 기분을 안고 온갖 노래를 부르며 몸을 흔들었다. 그럴때면 정돈되지 않은 머리와 마음 속에선 방정한 말 한마디만 한숨처럼 새어나왔다. 아아. 어쩌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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