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세포가 된 노래방 세포에 관하여
웹툰 ‘유미의 세포들’을 아시는지? 사실 내 또래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미의 세포들에 과몰입해 본 적이 있으리라 믿는다. 디지털 원주민이라는 위용에 걸맞게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이 웹툰을 보고 자랐고, 나 역시도 그랬다. 초등학생 시절에 마음의 소리가. 중고등학생 시절에 치즈인더트랩이 있었다면 대학시절에는 유미의 세포들이 있었다. 유미의 세포들은 그 정도였다.
세포깡이나 떡볶이 같은 콜라보 제품들, 이모티콘, 팝업스토어까지 가시적으로 확인 가능한 지표들도 널려있었고. 워낙 많은 사람들이 보다보니 어색한 동기들과도 유미의 세포들로는 한참을 떠들 수 있었다. 너라면 웅이와 다시 만나볼 생각을 안했을 것 같은지, 등장 인물들 중 누가 가장 자기 취향에 가까운지 같은 것들을 말이다. 등장인물 구웅은 전남친의 대명사 같은 인물이 되었고, 유바비는 뜨거웠던 인기만큼 결별 이후 거센 비난여론에 휩싸여 이름 대신 UBB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등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많았다. 노래방이라는 원래 주제를 두고 이게 무슨 횡설수설인가 싶겠지만은 이게 그렇지가 않다. 여기에서 소개된 ‘프라임세포’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작중 세계관에서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세포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성세포, 감성세포, 배가고프면 활약하는 출출이나 시도때도 없는 응큼이까지. 옥신각신 다투며 자기 주장을 해대는 세포들이 그 사람의 행동과 성향을 대변하고 결정한다. 예를들어 주인공인 유미에게는 소설가라는 직업에 맞게 힘이 센 감성세포와 열심히 글쓰는 걸 도와주는 작가세포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세포들 중에서 가장 힘이 센 세포는 ‘프라임세포’를 맡아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끼친다. 가볍게는 점심식사부터 중대하게는 퇴사같은 진로 문제까지! 이렇게만 들으면 유미의 프라임세포는 당연 작가세포가 아닐까 싶지만, 의외로 유미의 프라임세포는 ‘사랑세포’다. 유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고, 끊임없이 사랑에 대해 생각하며, 사랑에 관한 소설을 쓴다.
햐. 사랑이라. 그거 참 듣기 좋은 말이다. 하지만 쉽지는 않다. 특히 심미적, 심리적 저지선이 높고 현실에 번쩍 눈이 뜨인 사람이라면 더더욱. 예전에 아주 재미없는 소개팅을 한 적이 있는데, 상대 남자는 아주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번듯한 곳에 다니고 아주 멋진 일들을 많이 하시고 계신 것 같았지만‥ 일단은 외양이 너무 취향에 맞지 않았으며, 환경을 생각한다면서 취미는 골프라는 사실이 상당히 깼다. 관심없는 상대와 대화하는 내내 등은 등받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고, 상대방도 안절부절 눈을 마주치지 못하던 첫 10분을 지나치자 내 심리를 눈치를 챘는지 신변 잡기식의 대화만 오갔다. 분야가 아주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화 자체는 나름 건설적이었으나, 본디 소개팅이 보란 듯이 건설적이라는 것은 망했다는 말이다. 결국 3시간 정도의 만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분이 힙합에 진심이라는 것 뿐이었다.
2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부터 결심한 원칙이 있는데, 바로 새롭게 만나는 사람에게는 요즘 듣고 있는 플레이리스트를 물어보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부족하고 익숙한 것이 편해지다보니 새 노래를 찾아 듣는게 쉽지 않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전혀 모르던 분야의 좋은 노래를 많이 알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다가 좋은 대화소재가 되기도 해서 낯선 사람과 대화할 기회가 오면 기회를 틈타 꼬박꼬박 물어보곤 한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좋은 경험’정도로 마무리 되고 있었던 소개팅 중 이거라도 건져야겠다는 마음으로(미안합니다!) 좋아하는 노래를 물어봤다. 성시경이나 블랙핑크를 예상했지만, 그분은 단호하게 ‘힙합’이라고 답했다.
그날 비가 추적거리지만 않았어도, 주변에 괜찮은 노래방을 알고만 있었어도 노래방에 직행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당당하게 좋아하는 장르를 말하는 사람이라면, 노래방에 가면 좋겠다는 말에 흔쾌한 사람이라면 확률적으로 실력이 좋다. 하지만 주변에는 괜찮은 노래방이(아주 분명하게 퇴폐업소가 아니고, 코인 노래방처럼 좁지 않으며, 낮 2시에 가도 민망하지 않게 적당히 환한 분위기의 인테리어를 가진) 없었고, 슈퍼비와 행주를 좋아한다던 그분의 랩실력은 영원히 미궁속에 빠지고 말았다. 미련 없는 소개팅이었지만 단 하나, 노래방용 힙합의 스펙트럼을 넓히지 못했다는 것 만큼은 상당히 아쉬웠을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애정관계에 노래방이 불쑥 끼어든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나는 일생 내내 노래방에 진심이었는데, 유독 애정기류에 있는 사람과는 노래방에 잘 가지 않았다. 가면 필히 이 관계가 망할 것이란 것을, 새침하게 숨기던 몇 가지 숭하고 못난 면모를 까발리고야 말 것임을 은연중에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대학생 시절, 아주 짧게 묘한 관계에 있었던 친구도 그랬다. 우연한 계기로 만났고 누군가에게 얘기할 정도로 끌리지는 않는, 대화가 끊길 듯 이어지는. 소위 간보는 사이였다. 기프티콘을 써야하는데 함께 빙수를 먹으러 가지 않겠냐는 뻔한 핑계로 만난 뒤 딱히 할 말이 없어지자, 그때도 나는 ‘무슨 노래를 좋아하냐’고 물어봤다.
그는 (편의상 ‘판다’라고 부르겠다) 한때 에이핑크를 진심으로 좋아했다고 말했고 케이팝이 핏줄 안에서 콸콸 흐르고 있는 나는 단숨에 흥이 오른 나머지 노래방행을 제안했다. 그때만 해도 그냥 같이 추억의 노래나 좀 부르고 재미있게 놀다 올 생각이었는데. 알다시피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미 몇 번 얼굴을 본 사이였기 때문에 마침 코인 노래방에 가는 것도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낮 2시에, 노래방에 간 판다와 나는 무난하고 흥겹게 노래를 시작했다. 나는 ‘사랑은 은하수 다방’으로 첫 곡을 열었고 판다는 멜로망스의 ‘선물’을 불렀다. 그 이후로도 ‘애상’이나 ‘폰서트’처럼 기분좋고 가벼운 곡들이 지나갔고, 판다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노래방에만 가면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망아지인 나는, 특히나 그때는 더 증상이 중증이였던 나는. 홀로 남아 텅빈 화면과 마주한 나는 이 기회를 틈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관심이 있는 사람과 노래방에 갔는데 미친 짓이다 싶지만, 그때의 나는 눈에 봬는게 없었고 이 관계에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델의 ‘Rolling in the deep’을 불렀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노래방을 좋아하는 사람이지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 말인즉슨, 아델의 노래를 부르면 열성을 다하는 몰골에 비해 결과물이 썩 아름답지는 않다. 그리고 인생의 법칙이 무릇 그러하듯, 내가 열심히 사랑의 분노에 대해 열창하고 있을 때 판다는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문을 열면서. 젠장.
이후로는 그냥 맘대로 노래를 불렀다. 나의 신남과 진심에 약간 감화된 판다를 종용해 ‘너도 부르고 싶은걸 부르라’며 같이 에이핑크의 노래를 불렀고, 교대로 목의 핏대를 세우며 ‘Let it go’를 불렀다. 마마무 노래도 부르고 랩도 했다. 자괴감을 밑에 깔고 질주하는 노래방 메들리는 너무 신나고 재미있었다. 나중엔 판다도 개운한 한숨을 쉬며 ‘노래방에서 이렇게 재밌게 논거 오랜만이다!’라고 말했으니 말 다했다. 너무나도 예상 가능한 결말이지만, 우리는 그 멋진 시간 후로 지나치게 편해졌고 묘했던 관계는 개같이 망했다.
생각해보니 고등학생 때 만난 첫사랑과도 노래방에 함께 간 적이 몇번 없다. 학생 주머니사정으로 갈만한데가 마땅치 않은데다 내가 노래방을 사랑하는 것에 비하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아마 그때도 성에 차지 않는 얌전한 팝송을 부르며 내심 눈치채고 있었던게 아닐까. 노래방에 가면 방심한 순간, 나의 프라임 세포인 노래방세포에게 손쉽게 자리를 넘겨주고야 말았으리란 사실을. 프라임 세포인 사랑세포 덕분에 로맨스 소설 작가로 대성했던 유미에 비하면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조금 억울하단 생각도 들지만, 나도 노래방 덕분에 즐거운 시간도 많이 보내고 이렇게 재밌는 글도 쓰게 됐으니. 지금까지도 아주 재밌게 살고 있으니 만족 해야지 별 수 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