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혼자는 두렵다.
지나치게 사회화가 잘 된 탓인지, 태생부터 겁이 많은건지 몰라도 나는 유년기부터 혼자서 하는 모든 일들을 무서워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살던 집은 계단이 건물 밖으로 나있는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비가 오면 계단참에 핀 나팔꽃 잎에 토도독 물방울이 맺혔고 해질녘 감나무에는 감빛보다 더 붉은 노을이 무르익었다. 고요하고 따듯한 집은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이었지만, 나는 늘 내 겁의 원인에는 7명의 대가족이 함께 살던 유년의 탓이 있으리라 투정한다.
어린이의 참새 같은 말소리와 어른들의 끊임없는 발소리 사이, 쉴 새 없는 소란이 보통의 상태인 집에서 맞이하는 고요는 무섭고도 낯설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엄마 아빠가 모두 외출하고 없는 날이면 나는 언제고 그들이 돌아올 것을 알아도 그 사실을 모르는 전혀 사람처럼 울어댔다. 유치원에서 하교 하는 길이면 언니가 걸음이 느린 나를 두고 먼저 현관문에 도착할라 칠때마다 혼자 계단을 굼실거리고 있는 내 모양새가 서러워서 그자리에 발을 딱 붙이고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제발 조금만 기다렸다 같이 오라고 매번 언니를 타일렀고 언니는 매번 울어대는 내가 미워서 자꾸 먼저 계단을 올랐다.
나는 태연하지 못한 내가 늘 혼란스러웠다. 언니와 동생은 엄마아빠가 외출해 없는 날이면 티비를 보건 카드게임을 하건 하다못해 저들끼리 역할극을 하건 그저 즐겁게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왜 이럴까? 왜 함께 놀다가도 잠시 조용해질라치면 눈물이 나고 금지 당했던 애니매이션을 몰래 보다가도 걱정이 되어서 안절부절 전화를 걸까? 실제로는 삼남매가 모두 서프라이즈나 스펀지 여름 납량특집 같은 티비 프로그램도 못 봐 눈을 감고 채널을 돌려버리던 싱거운 겁쟁이들이었으나, 셋이서 집을 지키는 날 두려움과 서러움에 가장 크게 떠는 사람은 나였다. 나는 그 사실이 늘 의아했다. 왜 다들 괜찮지? 왜 나는 괜찮지 않지?
이제는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안다. 나는 타고나길 불안이 많은 사람이고, 감각이 둔한데에 비해 감정은 풍부해서 크는 과정이 꽤 어려웠다. 주변 정보를 이해하기 버거웠고,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 모든게 다 느껴지긴해서 소화를 시키지 못한것처럼 가슴 언저리가 따끔했다. 게다가 첫째라는 순서를 달고 태어나 어쩐지 미더운 언니와 귀한 아들로 태어난 동생 사이에서 불안이 많은 어린이로 지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불안을 곱씹고 더디게 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또래에게 기대고 덧입혀지며 변하듯이, 나도 서서히 무서울게 없는 청소년기에 접어들었다. 수업시간에 몰래 아이돌이 출현하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노래방에 가기 위해 사소한 거짓말을 했다. 주변 친구들중엔 벌써 화장을 그럴듯하게 하거나 맥주를 홀짝여봤다고 무용담을 늘어놓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이따끔씩 동참하고 대부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확연하게 겁대가리를 상실해 나갔다.
그 시절 중학교에선 학기가 끝나갈 때 쯤 자유시간을 줬다. 그리고 대부분의 중학생들은 수업용 컴퓨터로 '가가라이브'에 접속해 낯선 사람이 내뱉는 무분별한 음담패설을 구경하며 깔깔 웃거나 사람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류의 공포영화를 시청하며 자유를 누렸다. 서로의 팔짱을 낀 채로, 어깨를 때리거나 무릎을 벤채로 맞이하는 세상은 그다지 서럽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 1원칙이자 가장 필수적인 전제조건은 '혼자가 아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부드럽고 호의적인 팔짱 없이, 기대고 맞부딪힐 어깨 없이, 의심없이 내어 줄 무릎 없이 그 모든 일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혼자가 되어선 안된다는 두려움이 다른 두려움을 모두 집어삼킨게 아닐까. 나는 꽤 오래 청소년기의 연애와 같이 진득한 우정을 되돌아보곤 했다. 놀랍게도 이제는 그 밀도가 더 무섭게 느껴진다.
어찌 됐건 혼자는 두려웠다. 그 시절 혼자여도 괜찮다는 확신 없이 내팽겨쳐지듯 처음 방문해본 차가운 병원의자는, 뒤척이며 잠들던 기숙사는, 주문하는 타이밍을 잡으려 애쓰던 음식점은, 온 몸이 굳어버렸던 대학교의 면접고사장은 모두 긴장되고 어려웠다. 그런데 그런 일이 반복되고 쌓이더니, 계속되고 꾸준하더니 어느 순간에는 태연해지고야 말았다. 나는 연세내과의원에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언뜻 멀쩡한 것 같아서 내버려 뒀는데, 열기와 불편함이 목을 타고 넘어와 코와 미열로 이어지던 지지부진한 감기에 걸린 날이었다. 이전에 쓰던 약이 잘 받지 않았는지 몸이 좀체 좋아지지 않아서, 나는 대학 동기들에게 친절하다고 추천받은 연세내과의원에 방문해 한번 더 진찰을 받았다. 중년의 의사선생님은 과연 친절하셨고 나는 이리저리 질문을 해가며 진찰을 받았다.
왜 처음엔 목이 아팠는데 이제 코감기 같아진건가요?
감기란게 곧잘 그럽니다. 증상이 변해요.
코랑 기침 빼곤 멀쩡한 것 같은데 안낫는 이유는 뭘까요?
젊어서 멀쩡하게 느껴지는거죠. 낫는 중이긴 한데 원하면 약 좀 더 쎄게 처방해 줄게요. 빨리 낫고 싶으면 밤에 돌아다니질 마세요.
네? 밤에 돌아다니면 더 안좋나요?
당연하죠. 찬바람인데.
요리조리 신나게 질문을 하고 진찰실에서 나온 뒤, 나는 후련하게 약을 타왔다. 친절한 진료 덕인지, 뻔뻔함이 늘어서인지 다른 감상 없이 후련하기만 했다. 원하는 것을 모두 물어봤고, 바라던 대로 약을 타고, 씩씩하게 눕고 쉬었다. 그리고 그 날을 기점으로 홀로 하는 일들이 그다지 무섭지 않아졌다. 나는 홀로 영화를 보러 갔고, 도서관에 갔고, 꽤 자주 장을 보고 밥을 먹었다. 가끔은 색다른 시도가 해보고 싶어서 패스트푸드가 아니라 초밥집이나 뷔페처럼 번듯한 식사를 하러 나섰고 이 모든 일들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태연하고 자연스러워졌다. 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없어도, 확실하게 팔과 손에 맞닿는 감촉이 없어도 괜찮다는 확신은 동지날 일출처럼 더디게 찾아왔다.
왜 꼭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혼자여도 괜찮다는 믿음이 너무 약해서라고 생각한다. 늘 누군가와 살갑게 맞붙어 지내왔기 때문인지 곁에 있고 살을 부비지 않아도 서로를 믿는다는 일은 너무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함께하면 명백하게 더 좋은 일을 무엇하러 혼자 한단 말인가? 나는 낯선 공간에 가면 곧잘 그 공기와 불편함에 압도 되었고 이사를 갈 때나 직장을 옮길일이 있을때면 조금이라도 먼저 편해지려고 무작정 같은곳을 여러번 방문하곤 했다. 누군가와 함께일 때는 낯섬도 설렘으로 감춰버릴 수 있건만 혼자 감당하는 설익음은 잘못 깨문 얼음처럼 서걱이며 생생하다.
친구들이 혼자 여행을 다녀 왔다는 말을 할때나 홀로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왔다는 이야길 들을 때, 콘서트나 전시회에 혼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진심어린 감탄과 민망함이 섞인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너무나도 태연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홀로 겪은 시간을 회상할 때마다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머리론 홀로 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은걸 알아도 몸과 마음은 아직 따라오지 못한게 분명했다. 맛집을 찾아가 홀로 밥을 먹어도 성취감이 들지언정 즐겁지는 못한 나를 보며, 나는 여전히 이유를 찾고 있다. 나는 이제 꽤 독립적인 어른이고 혼자서도 잘 자고 잘 먹고 편안한데. 그럼에도 혼자 떠난 여행은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고 홀로 앉아있는 카페에선 손과 발의 위치가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맛집이나 영화관, 도서관은 혼자서도 꽤 자주 가지만 정말 꼭 보고싶거나 먹고 싶어서 좋았지 혼자라는 것이 함께인 것보다 즐겁거나 편안하지는 않더라.
그러니 이번엔 혼자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찾아다니며 이유를 찾아볼 작정이다. 어느덧 인생의 한 단계를 넘어섰다는 듯 태연한 친구들의 얼굴들을 보면, 어엿하게 부동산을 계약하고 운동에 등록하는 나를 보면 이제는 응석에서 벗어날 때가 아닌가 싶다. 진정으로 내가 나를 책임질 준비를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니 말이다. 물론 여전히 혼자서는 싫다. 그러나 이리저리 노력해본 결과에도 같은 답이 나올지는 두고 볼 일이다. 목적없이 카페에 가서 시간보내기, 전시회나 공연에 가보거나 아예 여행이나 호캉스에 나서보는 것도 좋겠다. 날씨가 좋으니 소풍에 가거나 페스티벌에 가서 앉아있는 것도 즐거워 보인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내가 제법 어엿한 어른이 되었던 것처럼 반복하다보면 또 제법 즐거워질지도 모른다. 혼자라는 것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