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난 용

나의 개천 이야기 1 - 개천의 전모

by 파도타기

개천에서 난 용의 기준은 무엇일까? 대통령쯤 되어야 용이 되는 것일까?

용의 기준은 개천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그저 따스한 방한칸에도 용이되고, 고가의 아파트에 살아도 심드렁한 뱀 취급일 수 있지 않은가?

나도 개천에서 난 용이란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듣는 대상은 당황스럽다.
개천을 부인할 수 없어서 거북하고, 밑바닥을 들킨 것 같아 때로 분노한다.
그 상처는 영혼의 무의식에 웅크리고 있어서 다양한 형태로 표출한다.
개천에 대한 상처이고 사람들에게 들킨 수치심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주 조금씩 무의식에서 개천을 걷어내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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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개천이야기는 그래서 시작되었다.

"여기 애들은 다 그지새끼들이다. 아침이면 동굴 같은 데서 기어 나온다"

교사로 첫 발령 받은지 2개월도 안 된 시기였다.

1학년 부장선생님의 말을 들은 난 온몸이 떨렸다.

당시 선생님들도 날 그지새끼라고 생각했구나.

"저도 그런 집에서 살았어요. 그렇다고 그지는 아니잖아요?"

"김 선생 왜 그러나? 내가 김 선생한테 뭐라 그랬나? 왜 그래?"

그랬다. 부장님이 나한테 잘못한 일은 없었다. 다만 선생이라는 사람이 제자를 평가하는 그 말이 나의 개천을 건드렸을 뿐.

교육부장관이라는 사람이 민중은 개돼지와 같다고 한 말에 온 국민이 분노했듯이..

나의 그지집은 부장선생이 말한 동굴보다 심했다. 사실 그 동굴은 주택의 반지하 거의 지하 셋방을 말한다.


1960년대 후반, 나의 그지집은 일명 병마골, 피난민수용소로 지어졌는데 방한칸 부엌이 10 여집이 일자로 붙은 건물이 빌라촌처럼 9동 이상 지어진 곳이다.


집이라기보다 방이 붙은 곳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비가 오면 부엌 쪽 밭에서 흙탕물이 부엌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집은 밭보다 1미터 아래에 지어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거긴 지금 생각하면 언덕을 밀고 지었나 보다. 우리 아랫동은 우리보다 또 1미터 낮았다. 그래서 그 집들은 모두 같은 처지였다. 부엌문 바깥에 흙으로 물길을 내고 비닐조각으로 물막이를 만들었지만 빗물은 부엌으로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천정에서도 내렸다. 평소엔 쥐들의 올림픽 경기장이었는데 비가 오면 그 또한 빗길이었다. 그래서 양동이 세숫대야를 놓아야 했고 수건으로 계속 닦아냈다.


물은 연탄아궁이까지 들어와 불이 꺼지기 일쑤였다. 아궁이에서, 부엌바닥에서 열심히 물을 퍼내야 했던 겨우 11살 소녀는 그게 힘들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우리 동네는 누구나 그렇게 살았으니까.. 1동에 10 여집, 그런 건물이 9개, 한 집에 평균 5명이 살았다면 최소한 450여 명이 한동네에 살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화장실을 사용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추악한 그림이 그려지는... 절대 묘사하고 싶지 않은 추억 아닌 악몽이다. 내 개천의 전모일지도...


아침마다 줄 서기는 당연지사, 여름엔 구더기가 우굴거리고 침과 토가 발 디딜 곳을 점령했다. 겨울엔 거꾸로 자라는 황금 고드름을 높여야 했고 여름엔 그 깊은 곳에서 엉덩이까지 튀어 오른 오물을 견뎌야 했던...
화장실만 한 개가 아니었다. 우물도 한 곳이었다. 그래서 물을 길으려면 줄을 서야 했고 큰딸인 내 몫이었다.


사실 그지새끼 맞았다. 씻기가 힘드니 언제나 얼굴만 세숫대야에 조금 담아 씻어야 했으니, 목욕은 여름에 오릿길을 걸어가 멱감는 게 전부였다.
지금도 씻는 일에 게으른 것은 그 시절 탓이라고 투덜댄다.

동네사람들이 대부분 밑바닥 삶이라 그랬는지 남자어른들은 늘 술에 취해 있었고 새벽이면 자기 집을 못 찾아 옆집, 아니 옆방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래도 그 동네 아이들은 다른 세상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하교 후에는 말타기 술래잡기 땅따먹기 등을 하며 땀에 절은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뛰어다녔다.
덕분에 당시 나의 개천은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내 어린 삶을 갸여워하는 사치는 오히려 성인이 되어 물질적으로 성공한 환경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감사할 일이다.

Ai로 작업한 빈민가 밝은아이들

대학시절에도 병마골은 나를 삼키고 있었나보다.
오래된 공책에서 시 몇 편을 찾았다.

병마골의 아침

6.25 때 생겼다는 포로수용소 병마골은
구멍난 벽돌로 지었다
여인숙 아닌
살림방만 길게 늘어놓았다지

단칸방엔 일곱식구가

한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밤에는 어우러 사랑도 하고
하루종일
싸움소리 요란한데

산파없이 태어난 내 동생은
햇살보다 먼저 일어나
튼튼히 울어댄다.

씨앗장사하는 김씨 할배는
어제처럼
리어카 삐걱이는 소리에 맞춰
다리를 절며 천천히 나아가고
채소장수 옆집 아주머니는
이미 보이지 않는다.

싸움소리 그치는 날 없고
경찰서를 내집처럼 드나드는
이웃집 형은
오늘도 풀려났다는 소식이 없고

도둑없는 마을이라 좋다는
우리 엄마는
대문 없는 방문도 잠그지 않는다.

달도 취해 잠든 새벽,
아버지는 옆집 미아네 방문을 여셨다.
도둑이야
혼자사는 미아엄마의 비명에
마을이 시끄러워진다.

숙제를 못한 2학년 아이는
선생님의 매타작이 무서워 학교도 못가고

공중화장실 뒷길에서
딱지치기만 하는데
잘도 뒤집어지는 딱지에 환호성

마을을 지키는 우리 아버지
술내나는 코고는 소리에
병마골도 다시 잠들고
해가 중천에 떠도 일어날 줄 모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