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천이야기 2 - 우린 너무 늦다
"동네사람들, 여기 좀 보시오.
곱슬머리 독하다 독하다 말만 들었지 이렇게 독한 줄 처음 보았소"
집주인인 친구 엄마가 내 손에서 친구의 머리카락 한 줌을 빼앗아 높이 들고 소리쳤다.
곱슬머리는 그래서 또 내 치부가 되었다. 독함의 상징이라니...
우린 같은 반 친구 주희네 집에 방한칸을 얻어 세 들어 살았다. 싸움이 늘 그렇듯 아래서부터 올라와 어른 싸움이 되고, 우린 전형적인 싸움을 종종 했다.
주희는 4학년 같은 반 친구였는데 성적은 거의 하위권이었다.
내가 다닌 동명국민학교는 제천 시내 한복판 명동에 있었다. 그래서 제천 시내 모든 부자아이들이 다녔고 나 같은 병맛골 아이들이 함께 다녔다.
부잣집 아이들은 당시 영화 속 아이들처럼 예뻤다. 양갈래 머리를 길게 땋았고 멜빵주름치마에 하얀 스타킹을 신고 까만 구두를 신고 다녔다. 하교 땐 피아노 가방을 들고 학원으로 갔다. 이 아이들은 나 같은 가난한 아이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냄새라도 나는 듯 분별하고 피했다.
그러나 나도 주희 같은 아이들과는 말을 섞지 않았다. 나의 성적은 상위권이었으니까...
그런 경희가 집주인의 위세로 내게 도전한 것이다.
이유는 자기네 마당이니 밟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넓은 마당을 지나야 담벼락 근처 우리 집으로 아니 우리 방으로 갈 수 있는데 말이다.
날아갈 수도 없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난 분노해서 일명 머리끄덩이 싸움을 하게 되었고 머리카락 한 줌을 승리의 재물로 취한 것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우리 집은 '그지집' 병맛골, 피난민 수용소 한 칸을 6만 원에 사서 이사했다.
아이들을 셋방에서 키우면 기죽는다. 하꼬방(육이오 시절 천막집?)이라도 내 집에서 키워야 한다고 엄마는 열을 올리셨다.
하지만 '내 집'은 '그지집'으로 낙인찍는 일임을 엄마는 모르셨다.
엄마만 모르신 것은 아니었다.
엄마의 ' 내 집' 주장은 진리였지만 내가 아들에게 같은 '그지집' 상처를 주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당시 우린 2층 주택에 세 들어 살았는데,
5살 아들이 말했다.
"엄마, 위에는 집이 있고 아래는 집이 없는 집으로 이사 가자."
퇴근 후에 방에서 공놀이할 때마다 아랫집 할머니가 시끄럽다고 올라오셔서 공놀이를 못하게 하자 한 말이었다.
나 역시 우리 엄마처럼 내 집을 갖기로 했다. 위에는 집이 있고 아래는 집이 없는 빌라 지층 1호, 아니 B1호.
집을 계약할 때만 해도 1층이라고 했다. 그런데 공사 중에 땅에 물이 많다면서 파내기 시작했고 결국 우린 계단이 3개 내려가는 반지하를 사게 된 것이다.
34년 만에 내 집은 처음이라며 흥분했던 남편도, 아래에 집이 없어 얼마든지 뛸 수 있다던 아들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 집을 수치로 생각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친구를 데려오지 않았고 친구들에게 숨기며 부끄러워했다.
성남의 빌라, 아니 다세대주택 반지하에 사는 아들은 서울 송파의 아파트촌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녔다.
엄마의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방이 있고, 방에는 온갖 장난감이 기득 하다고 처음 친구네 집에 다녀온 날 흥분해서 이야기하던 아들은, 그날 이후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로 이사 간 후 중학생이 된 아들은 드디어 그 부끄러움을 '내가 살던 옛 동네 '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면서 동양빌라 B1호로 명명했다. 진솔한 이야기에 장원을 해서 축하를 받았지만 아들에게 같은 상처 같은 낙인을 찍는 일임을 그때는 몰랐다.
우린 늘 너무 늦다.